혜초의 발길
신라는 통일 이후 밀접한 관계를 지속하던 당나라에 많은 승려를 파견해 선진 불교를 배우도록 했다. 당으로 건너간 신라의 승려들은 당에 남기도 하고 신라에 돌아오기도 했다. 723년, 열아홉의 나이로 당나라 광주에 도착한 승려 혜초는 고승 금강지의 제자로 들어가지만, 살아있는 지식을 얻으려는 열망을 품고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 건너가기로 결심한다. 광주에서 배를 타고 인도네시아를 통과해 북인도의 동해안에 상륙한 뒤, 서쪽으로 길을 걸어 인도 대륙을 횡단하고, 아랍과 중앙아시아까지 나아갔다가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파미르 고원을 거쳐 727년 중국으로 귀환한다. 4년의 농축된 기간 동안 넓은 지리적 공간을 섭렵한 혜초는 장안에 머물며 평생 경전의 연구와 번역에 주력한다. 학문적
업적도 대단하지만, 그의 진수는 인도 여행에서 빛난다. ‘왕오천축국전’으로 알려진 글이 바로 그가 남긴 여행기다.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은 오랜 세월이 지나 1908년 둔황의 한 석굴에서 발견되었다. 3.58m짜리 두루마리에 5,893자가 227행으로 담겼다. 많은 부분의 글자가 지워졌거나 흐릿하며, 아예 사라진 부분도 있다. 국내외 수많은 학자들이 인도를 여행한 다른 승려들의 기행문과 비교하여 지워진 글자를 추정하거나 흐릿한 글자를 완성하고, 지명과 풍속 따위에 관련된 이름들을 교정하며, 아예 떨어져 나간 부분을 찾는 고고학적 탐색도 벌였다. 그러나 ‘왕오천축국전’의 완벽하고 정확한 복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오천축국전’이란 인도의 다섯 지역(五天竺國)을 갔던(往) 기록(箋)이라는 뜻이다(하지만 실제로 혜초의 행적은 인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에 걸친다). ‘전’이라는 의미에 충실하게, 주로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이 책에는 출발부터 도착까지 일목요연한 시간 추이, 방문한 수많은 장소의 위치와 규모, 지역마다의 정체(政體), 외부와의 관계, 생태와 지리, 특산물, 전통 의복과 관습, 언어, 종교(특히 불교의 성행 여부)와 같은 정보가 세세하게 담겨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왕오천축국전’을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련한 귀중한 사료로 대한다. 문학으로 평가할 때에도, 고구려의 광개토왕 비문이나 백제의 무령왕릉 비문에 비해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한국 문학사의 가장 오래된 텍스트라는 점을 부각시켜 한국 문학의 기원을 더 먼 과거까지 넓혀준다는 가치를 부여한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이나 문학사 최초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넘어서, 혜초의 글은 대상을 대하는 끈질긴 성찰의 힘으로 우리 삶의 본질적 문제를 깊이 돌아보게 해준다.
언어와 대상
방랑자 혜초는 먼 타향에서 외롭고 고달플 때마다 시를 쓴다.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다섯 편의 시는 직접 보고 들은 대상의 기록이라는 기행문의 형식을 독특하게 만든다.
月夜瞻鄕路(월야첨향로) 浮雲颯颯歸 (부운삽삽귀)
緘書參去便(함서삼거편) 風急不聽廻 (풍급불청회)
我國天岸北(아국천안북) 他邦地角西 (타방지각서)
日南無有雁(일남무유안) 誰爲向林飛 (수위향임비)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숲으로 날아가리. (정수일 역)
혜초는 남천축에서 어느 버려진 곳을 보고 이 시를 쓴다. 절은 황폐하고 승려는 없다. 황량한 풍경에 젖은 그의 마음은 머나먼 어딘가로 떠난다. 떠도는 구름만이 눈에 들어오고, 내면은 달빛 어린 고향 가는 밤길로 향한다. 향수를 달래느라 구름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 요청하지만 구름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기만 한다. 마음은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가득하고, 고향은 북쪽 지평과 서쪽 변방 사이에서 하염없이 멀어져 간다. 구름 대신에 기러기를 찾지만, 기러기는 더운 그곳에 살지 않는다. 이제 메신저는 어디에도 없다.
여기서 ‘숲(林)’은 ‘계림(鷄林)’을 가리키는데, 계림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를 의미한다. 신라인은 숲을 신성하게 여겨서 신라에 ‘계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혜초의 눈이 황폐해진 절을 보는 동안, 마음은 눈앞의 절 대신에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으로 가득 차는데, 이 숲은 과거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의 상징이 된다. 마음은 현재 육체가 처한 장소에서 무한정으로 떨어져 나와 언젠가 돌아가고자 염원하는 어딘가로 향한다. 그러나 그렇게 잠시 떠나있던 마음은 눈앞의 대상으로 다시 돌아오고, 그 마음의 흐름에 실린 눈은 절의 황폐함을 더욱 뚜렷하게 인지한다.
필연을 바꾸는 우연
김연수는 소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혜초의 여행을 우리 곁에서 재생한다. 주인공 ‘그’는 자살한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왕오천축국전’임을 알게 된다. 그녀가 남긴 유서의 내용도, 하필 왜 그 책인지도, 이해할 수 없는 ‘그’는 마치 주석을 달 듯 그녀와의 연애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그리고 한 달이 걸려 설산을 넘는 혜초를 상상하며 낭가바르트 원정대에 참가하다가 설산의 정상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 곳에서 눈보라에 휩쓸려 행방불명된다. 소설을 쓰거나 산을 오르는 내내 ‘그’는 ‘왕오천축국전’의 문구들을 메모하고 되뇌면서 사라진 글자를 복원하는 일에 골몰한다. 혜초가 어떤 글자를 썼는지는 혜초만이 아는 필연의 것인 반면, ‘그’의 상상은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는 우연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남겨진 ‘왕오천축국전’은 혜초의 필연의 세계가 아니라 ‘그’에게 남은 우연의 세계다. 글자를 상상하고 주석을 붙이는 ‘그’의 우연한 일은 혜초의 필연의 세계를 바꾼다.
글자가 사라지고 흐릿해진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을 들여다보면 혼자 길을 걷는 혜초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라지고 흐릿해지는 글자를 추적하는 일은 곧 그의 발길을 따라가는 일과 같다. 글자를 추정하는 데 따라 그의 발길이 변하고 그가 본 대상도 바뀌며, 글자가 사라지면 발자취도 사라진다. 글자를 들여다보면 어쩐지 막연한 느낌이 든다. 혜초 자신은 자신의 글자가 사라지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는 여행을 마치고 원래의 출발지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사라진 글자들을 상상하면서 여행을 이어간다. 그것은 방랑자 혜초의 업을 따라가는 일이기도 하다.
업과 더불어 걷는 삶의 여행
사라지고 흐릿해진 글자를 추적하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읽을 때 우리는 그가 묘사한 대상보다 그 앞에서 주춤거리며 잠겨 들어간 그의 마음을 만난다. 그의 여행은 사실 마음의 여행이었다. 황폐한 절을 눈앞에 두고서 과거에 보았던, 그리고 미래에 돌아가고 싶은 울창한 숲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다. 그는 여행 내내 머뭇거리고 외로워하며 향수에 압도된다. 그러다 다시 대상으로 시선을 옮기며 발길을 재촉한다. 목표에 도달하는 성취의 기쁨보다 과정을 견디는 연민이 우리 마음에 들어온다.
혜초의 여행은 업을 풀고 다시 업에 치이며 살아가는 우리 삶의 비유다. 윤회의 고리를 끊는 해탈은 업의 극복을 전제로 한다. 극복하지 못하면 반복되는 업, 그것이 우리가 처한 윤회의 고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업의 극복은 인간으로서 이루어내기 힘든 영역이다. 살면서 스스로를 하나의 목표로 이끄는, 또는 은연중에 고정된 목표를 강요당하는 고달픈 삶이 우리의 업이라면, 그 업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으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업에 더욱 얽매일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가능성은 업에서 벗어나는 대신 느슨하게 풀려 흐르는 업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혜초의 목표는 마주치는 눈앞의 대상을 묘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외롭고 쓸쓸할 때마다 시를 쓰고, 그러면서 열리는 마음의 눈은 잠시 그를 눈앞의 대상에서 떼어놓아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로 나아가게 한다. 현재의 목표에서 벗어나는 이 이탈의 순간이 여행의 또 다른 목표로 떠오른다. 목표를 하나로 고정하는 대신 여럿으로 변주하면서 그의 여행이 짊어진 업은 느슨해지고, 그래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목표를 여럿으로 변주하려는 의지가 바로 업에 대처하는 우리 삶에서 필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그저 업이 삶의 조건임을 인정한 채 삶을 이리저리 변주하며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삶은 업에서 멀어지고 업으로 돌아가는, 반복되는 수련의 과정이다. 그 끝없는 과정에 우리 삶의 진정성이 놓여있다. <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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