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4일24일 밤, 인도네시아 자바섬 반둥(Bandung). 7일간 이어온 아시아아프리카회의(Asian-African Conference)가 막을 내렸다. 개막 이전부터 회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강대국, 특히 서방국가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평화 10원칙’이라는 공동선언문이 발표됐으나 식민종주국들을 심하게 비판하는 내용은 없었기 때문이다. 평화 10원칙에는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와 민족 자결, 침략 부인, 국제 협력과 상호이익 존중, 기본 인권과 유엔 헌장 존중’ 등 상대적으로 온건한 문구를 담았다.
반둥회의는 영국과 프랑스 등 식민지를 운영하는 유럽뿐 아니라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아시아 23개국과 아프리카 6개국 등 29개 반둥회의 참가국의 인구 합계가 15억명. 세계 인구의 54%를 차지하는 나라들이 모였으니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회의 개막 직전 23억달러에 이르는 아시아에 대한 경제원조 계획을 발표해 본회의에서 미국에 불리한 의제 상정을 막으려 돈을 쓴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본의 참가. 남북한은 분쟁 당사국이라는 이유로 초청받지 못한 반면 식민종주국이며 침략국가인 일본은 버젓이 반둥회의에 꼈다.
이질적인 국가들이 모인 반둥회의의 최고 스타는 중국의 외무장관이자 2인자인 저우언라이. 참가국 간 이견이 맞서자 그는 ‘견해가 다른 부분을 남겨놓고 공통점을 먼저 찾아 합의하자’는 ‘구동존이(求同存異)론’을 펼치며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반둥회의는 양대 축이던 중국과 인도 간 국경 출동과 이집트가 주도하는 아랍연맹 실패 등으로 지도자들의 유대가 깨지며 동력을 잃어 2차 회의로 이어지지 못한 채 1차로 끝났다. 단 한 차례 열렸을 뿐이지만 반둥회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첫째, 탈식민·제국주의 극복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지역적 특수 이익이나 한풀이가 아니라 천부인권처럼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라는 점을 확인시켰다. 둘째, 1961년 비동맹운동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 반둥회의에 대한 한국의 기억은 어둡다. 반둥회의의 조카뻘인 비동맹그룹에서 북한에 외교적으로 밀린 경험이 많은 탓이다. 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정상회의(2015년)에서도 세계 109개국 정상들이 외교전을 펼쳤지만 한국은 교육부총리를 보냈을 뿐이다. 오죽하면 ‘한국은 아시아가 아니라 미국의 아이일 뿐’이라는 조롱까지 나돌았을까. 요즘 우리의 인식과 대응은 5년 전에 비해 나아졌을지 모르겠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