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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독일군, 연합국에 항복

1945년 유럽전선 종전

연합군 사령부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독일군 지휘부. /핀터레스트




1945년 5월7일 프랑스 북부 상공업 도시 랭스의 연합군 사령부. 독일군 최고 지휘부가 새벽 2시41분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5개 항으로 구성된 항복 문서의 골자는 시기. 모든 독일군이 유럽 중부표준시 5월8일 오후11시1분을 기해 항복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새벽에 손들 만큼 독일의 사정은 급박했다. 전력도 이미 무너진 상태. 4월 말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이 항복하고 히틀러 총통이 자살하는 등 독일은 전쟁수행 능력과 의지를 잃었다. 5월 초에는 베를린이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독일군이 미국과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항복했다는 사실을 소련은 인정하지 않았다. ‘승리의 주역인 소련군이 나치의 심장인 베를린에서 항복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연합군은 반박할 논리가 없었다. 미영 연합군이 서부전선의 독일군 56만명에 막힌 반면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450만 독일군을 눌러온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연합군의 막판 진군 속도가 다소 높아진 것도 소련군이 독일 대부분을 점령할 것으로 우려한 독일군이 사실상 길을 터준 덕분이라는 해석도 있다.



결국 독일군은 8일 오후10시43분 베를린 인근 소련군 사령부에서 다시금 항복 문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 항복 시간은 9일 0시42분(모스크바 기준). 동맹의 기치 아래 무기를 나누며 독일과 싸웠지만 서구권과 동구권의 전승기념일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초부터 연합국과 주축국은 싸움 상대가 못 됐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을 합친 국내총생산(GDP)이 연합군의 절반 이하였으니까. 종전 무렵에는 경제력 격차가 5.7배로 벌어졌다. 문제는 독일과의 종전이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연합군과 소련의 이해다툼이 유럽에서는 종전기념일 차이로 갈렸지만 한반도에서는 국토와 가족이 찢어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소련은 얄타회담 약속대로 독일과 전쟁이 끝나고 2~3개월 안에 대일본전쟁(태평양전쟁) 참전 준비에 들어갔다.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 시 인명피해가 클 것으로 우려하고 소련의 참전을 간청했으나 원자폭탄 개발이 성공한 뒤부터 계산이 바뀌었다. 소련의 참전 없이 대일전쟁 종결을 원했고 낌새를 차린 소련은 참전을 더욱 서둘렀다. 미국의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 한반도 분단으로 이어진 현대사의 언저리에 부질없는 가정이 맴돈다. ‘원폭이 보다 빨리 개발되거나 지연됐다면, 일본이 좀 더 빨리 아니면 더 늦게 항복했다면, 소련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했다면….’ 국토 분할과 내전은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일본의 몫이어야 마땅하거늘.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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