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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의 일본사 이야기]"일본을 세탁하고 싶다"...앙숙 사쓰마-조슈번 손잡게 한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와 삿초동맹]

번 버리고 낭인 자처...당대 양학자 가이슈 만나 해군·무역에 눈 떠

삼엄한 막부 순찰대 눈 피해 '反막부 전선' 삿초동맹 성사 이끌어

전쟁 승리 뒤엔 '근대국가플랜 원형' 고스란히 담긴 선중팔책 공개





오늘은 사카모토 료마의 얘기다. 손 마사요시(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극찬한 바 있는 일본의 국민적 영웅 료마는 어떤 인물일까.

료마 집안은 원래 부유한 상인 가문이었다.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하급 무사인 향사(鄕士) 신분을 얻었다. 신분은 낮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모르고 살았다. 5남매 중 막내였던 료마는 맏형과는 스무 살 차이였으니 친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신 세 살 터울 누나인 오토메와 단짝이었다. 얼마나 의지했는지 전국을 누비며 반(反)막부 활동을 할 때도 수시로 누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들은 우리가 료마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보물창고가 됐다. 페리가 왔을 때 료마는 때마침 검술을 배우러 에도에 유학 와 있었다. 료마는 서양 오랑캐의 목을 치겠노라며 큰소리쳤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년 넘는 에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료마는 도사번 최고의 난학자인 가와다 류조를 찾아갔다. 우리는 이 행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미 료마는 정신승리만으로는 서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풋워크(footwork) 의 경쾌함’이라는 료마의 특징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방향전환이다.

도사 번 고시(鄕士) 계급 출신으로 일본의 무사 겸 사업가인 사카모토 료마./사진=위키피디아


도사번 하급무사 중에는 다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라는 걸물이 있었다. 존왕양이 운동이 확산하는 가운데 그는 192명을 모아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을 결성했다. 가신단 내에 이런 당을 만드는 것은 군부 내 하나회를 만드는 것과 같다. 결성 맹약문에 료마는 아홉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료마가 보기에 다케치는 과격한 정신승리주의자였다. 일을 이루려면 인심과 돈을 장악해야 한다. 다케치는 오사카 상인들에게 ‘협조금’을 요구하자며 응하지 않을 경우 할복으로 위협하면 금방 내놓을 것이라고 태연히 말했다. 이런 방법은 인심도 돈도 잃게 할 거라고 료마는 생각했을 것이다.

료마는 1862년에 탈번(脫藩)했다. 오늘날의 국적이탈에 버금가는 모험이다. 다른 번적(藩籍)을 얻은 것도 아니고, 그냥 낭인이 된 것이다. 27세였다. 이해 에도에서 가쓰 가이슈를 만났다. 막부 측 인사 중 당대 최고의 양학자이면서 일본해군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가이슈를 만난 료마는 해군과 무역에 눈을 떴다. 바다의 주인이 세계를 제패할 것임을 직감했다. 이 무렵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일본을 한번 세탁해보고 싶다”고 썼다. 료마는 가이슈의 뜻을 이어받아 나가사키에 가메야마샤추(龜山社中)를 설립했다. 무역상사 같은 조직이다. 신분불문 인재영입, 무역장려, 외국어학습, 그리고 에조(지금의 홋카이도) 개척을 목표로 했다. 이는 나중에 도사번의 정식지원을 받아 유명한 가이엔타이(海援隊)로 발전하게 된다. 나가사키는 매력적인 냄새가 나는 곳이다. 도쿠가와 시대 전국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와 중국인이 거주했던 도시인 만큼 서양풍과 중국풍이 잘 섞인 도시다. 도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만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시가지가 잘 발달해 있다. 글로버 등 당시 동아시아 무역을 주름잡던 서양 상인들도 많이 들어와 있었다. 이 복잡한 도시에서 료마 일당은 암약할 수 있었다.

료마는 거대한 두 번인 사쓰마와 조슈가 손을 잡지 않고서는 막부타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런데 이 둘은 견원지간이다. ‘8·18정변’과 ‘금문의 변’에서는 서로 적군으로 싸웠다. 그만큼 불신도 깊었다. 먼저 신뢰부터 쌓아야 했다. 당시 막부의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조슈번에는 서양식 무기가 절실했다. 구입할 돈은 있었다. 다만 ‘금문의 변’으로 조적(朝敵)이 돼 활동이 제약돼 있었다. 하물며 서양무기 구입을 막부가 좌시할 리 없다. 이때 료마는 사쓰마를 설득했다. 사쓰마 명의로 무기를 구입해 조슈에 넘겨주자는 것이다. 조슈는 사쓰마가 그런 호의를 베풀 리 없다고 의심했지만 료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료마는 사쓰마 명의로 증기선(이름은 가고시마 앞 바다의 섬 이름을 따 사쿠라지마호로 했다)과 총포 등을 구입하고 조슈에 운반하는 일을 도맡았다. 그 사이에 양측의 신뢰도 쌓이게 됐다.

1863년 다카스기 신사쿠의 제안으로 조슈번이 결성한 사병 집단 조슈 기병대.


1865년 말부터 료마는 교토·나가사키·조슈를 바삐 오가며 두 번의 주요 인사와 접촉하고 있었다. 사쓰마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고마쓰 다테와키, 조슈번은 기도 다카요시, 히로사와 사네오미 등이었다. 마침내 1866년 초 막부 순찰대의 삼엄한 눈을 피해 교토에서 양측 대표가 회담을 시작했다. 오랜 숙원(宿怨)이 금방 해소될 리 없었다. 회담은 결렬 직전이었다. 기도는 료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료마의 임석하에 회의는 다시 열렸다. 격론 끝에 사쓰마는 앞으로 있을 막부의 조슈 정벌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며, 조슈가 역적누명을 벗는 데 힘을 다한다는 데 합의했다. 최강의 두 번이 반막부 전선에 결집한 순간이었다. 역사상 유명한 ‘삿초동맹(薩長同盟)’이다.

숙원을 달성한 료마는 가벼운 기분으로 교토 외곽의 여인숙 데라다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날 밤 막부 순찰대의 습격을 받는다. 료마를 예의주시하던 막부 측에 동선이 잡힌 것이다. 동료와 함께 큰일을 마친 여운을 즐기던 료마를 구해준 것은 데라다야의 여종업원 오료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욕조에서 피로를 풀던 오료는 바깥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료마에게 알렸다. 방에 있던 료마는 칼을 꺼낼 틈도 없이 기습당했다. 그를 살려준 것은 늘 품고 다니던 피스톨이었다. 사쓰마에서 히사미쓰에게 받은 것이다. 피스톨 방아쇠를 당겨 암살자 한 명을 쓰러뜨린 후 격투 끝에 데라다야에서 빠져나왔다. 오른손 검지가 잘려나갔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이 소식에 조슈의 기도, 조정의 이와쿠라 도모미도 기겁을 했다. 그러나 료마는 태연했다. 결국 목숨을 구해준 여인 오료와 결혼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기습당한 교토 외곽의 데라다야. /위키피디아


죽을 뻔한 료마에게 조슈로 떠난 기도의 서한이 날아든다. 그저께 사쓰마와 약속한 사항을 료마가 문서로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의심암귀(疑心暗鬼), 천하의 기도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료마는 기도가 보낸 편지지 뒷면에 회의에서 약속한 내용을 6개 항으로 써서 답신을 보냈다. 이로써 삿초동맹은 완성됐다. 사쓰마에 이제 료마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사쓰마는 료마를 보호하기 위해 사쓰마로 데려갔다. 료마는 아내 오료를 데리고 갔다. 이때부터 몇 개월간 료마 인생 최후의 달콤한 시간이 찾아왔다. 사쓰마의 환대 속에 온천으로, 명승지로 오료를 데리고 다니며 행복한 시간을 만끽했다. 일본인들은 이를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이라고 한다. 그러는 사이 막부와 조슈 사이에 전운은 높아져 갔다.

1866년 여름, 필사적으로 ‘근대화 개혁경쟁’을 하던 막부와 조슈가 마침내 충돌했다. ‘제2차 조슈 정벌전’이다. 이전에 정벌전이 한차례 있었으나 큰 전투 없이 끝났었다. 쇼군 이에모치는 오사카에 진을 치고 일왕의 칙허를 얻어냈다. 막부는 자기 병력과 다른 번의 군사력을 동원해 네 곳에서 진격해 들어갔다. 아무리 “숙연하기가 심야와 같이” 일치단결해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던 조슈번이라 할지라도 병력은 겨우 2만명. 상대는 막부 병력에다 다른 번 병력까지 가세해 수배에 달했다. 누구나 조슈의 멸망을 예상했다. 그러나 누구도 사쓰마가 이미 조슈 편으로 돌아선 것을 알지 못했다. 사쓰마의 지원을 확보한 조슈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 막부군은 숫자는 많으나 무기 수준과 사기 면에서 조슈만 못했고, 다른 번들은 막부의 명령이라 동원은 됐으나 전의는 제로에 가까웠다. 그들에게 바로미터는 사쓰마였다. 사쓰마가 움직이지 않으면 모두 빠져나갈 구멍만 찾을 셈이었다. 우선은 움직였다. 아무도 이미 삿초동맹이 맺어졌다는 것을 몰랐으니 말이다.

사카모토 료마의 아내 오료.


료마는 ‘신혼여행’을 급히 중단하고 글로버에게서 구입한 사쿠라지마호를 지휘해 막부와의 해전에 참전했다. 사쓰마 명의로 구입한 함선을 이끌고 조슈를 위해 막부와 전투를 벌이는 료마, 이는 반막부 연합의 상징적 장면이다. 다카스기 신사쿠와 료마의 활약 덕분에 조슈는 막부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제 사람들은 도바쿠(討幕·막부타도)와 왕정복고를 공공연히 떠들었다. 그러나 료마의 생각은 달랐다. 막부는 여전히 강대하다. 이를 무력으로 쓰러뜨리려면 큰 혼란과 희생이 따를 것이다. 그는 권력을 일왕에게 돌려주고(왕정복고), 그 밑에서 막부도 하나의 다이묘로 신정권에 참여하는 그림을 구상했다. 그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이 다음에 소개하는 ‘선중팔책(船中八策)’이다. 몇몇 조항을 인용해보자. “첫째,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돌려드려 명령이 조정에서만 나오게 할 것. 둘째, 상하의정국(上下議政局)을 설치하고 의원을 둬 일왕의 정치를 돕게 하고 만기(萬機)를 반드시 공론으로 결정할 것(중략). 넷째, 외국과의 교류는 널리 공론을 모아 합당한 조약을 새로 맺을 것. 다섯째, 고래(古來)의 율령을 참작해 영원히 지속될 헌법을 새로 정할 것. 여섯째, 해군을 확장하는 데 힘쓸 것” 등등.

놀라운 구상이다. 메이지 정부의 국시라 할 만한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가히 ‘일본 근대국가 플랜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그의 머릿속은 앞으로도 충돌할 사쓰마·조슈·막부를 잘 조화시켜 일본을 ‘세탁’할 구상으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 고생만 한 오료도 조금은 호강시켜줄 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늘은 이 젊은이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료마는 그해 겨울 교토 숙소에서 다시 한 번 막부 순찰대의 공격을 받고 저항할 틈도 없이 즉사했다. 메이지유신을 알리는 궁중쿠데타 발발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때였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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