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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로버트 리 장군





1859년 미국 웨스트포인트 출신인 존 브라운은 웨스트버지니아주 하퍼스페리에 있는 연방군 무기창고를 습격했다. 그는 이곳에 있는 무기를 탈취해 노예들을 무장시킬 생각이었다. 공격은 실패했고 브라운 일당은 로버트 리가 지휘하는 해병대에 붙잡혔다. 리는 강경한 노예해방주의자인 브라운을 체포한데다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에 속했던 버지니아주 출신이어서 당연히 노예제에 찬성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대였다. 그는 1856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노예제는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사악한 제도”라고 쓸 정도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리에게 북부연방군 총사령관 자리를 제의했다. 고향에 총을 겨눌 수 없었던 그는 링컨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하고 오히려 버지니아주 사령관으로 남북전쟁을 치렀다.

리 장군은 탁월한 리더십으로 가는 곳마다 승리했지만 병력과 보급 등 모든 면에서 열세인 남군의 패배는 기정사실이 됐다. 전쟁 막판 남군 총사령관이 된 리는 남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북군 총사령관인 율리시스 그랜트를 찾아가 항복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간 리는 버지니아주 남부에 있는 워싱턴대 학장이 돼 대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대학은 그의 공을 기려 학교 이름을 워싱턴앤드리대로 바꿨다.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25년 뒤인 1890년 버지니아주 주도인 리치먼드에 리 장군 기마상을 설치했다.



버지니아주가 최근 리 장군 기마상을 철거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시위가 격렬해지면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상징처럼 된 리 장군 기마상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외신에 따르면 인종차별 시위가 벌어진 최근 며칠간 리 장군 기마상은 예술·문화를 파괴하는 반달리즘의 대상이 됐고 기단에는 ‘백인우월주의를 멈추라’는 등의 낙서가 쓰이기도 했다. 그가 생전에 자신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세우지 말라고 한 것은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예감했기 때문일까. 남군 총사령관을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노예제에 찬성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는 사실을 알면 지하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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