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리스는 유럽국가 가운데 재정이 튼튼한 편에 속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이 20%대로 영국 등 다른 국가의 절반에 불과했다. 조선과 자동차 산업 등의 발전에 힘입어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5.5%에 달하는 성과를 자랑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1981년 총선 때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사회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그리스는 이전과 다른 길로 접어든다. 사회당은 재정 건전성을 중시하던 이전 정권의 정책을 버리고 퍼주기 복지에 몰두했다. 총선 직후 파판드레우 총리가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주라”고 지시한 것은 포퓰리즘 정책의 신호탄이 됐다. 이후 그리스 정부는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공무원 증원, 노동자 해고 제한 등의 정책을 폈다. 이것이 재정에 부담을 준 것은 당연지사. 그리스의 국가부채비율은 1983년 33.6%, 이듬해 40.1%로 껑충 뛰었고 1993년에는 100%를 넘어섰다. 결국 그리스는 2010년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다. 이때 구제금융을 신청한 이가 파판드레우의 아들인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였다. 아버지가 30년 전 남발한 ‘포퓰리즘 청구서’가 아들에게 날아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봐야 할 대목은 한 번 포퓰리즘의 단맛에 취하면 끊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후 그리스에서는 야당인 신민당도 정권을 잡기 위해 포퓰리즘 경쟁에 뛰어들었다. 여야가 표를 얻는데만 혈안이 됐으니 재정 건전성이 나빠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리스 사태가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은 지금 우리나라가 그 위험한 길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대응을 이유로 연일 재정에 부담을 주는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전 국민에게 지급된 재난지원금 후유증이 수습되기도 전에 여당에서는 기본소득 지급과 전 국민 의료보험 보장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물론 경제 비상사태를 맞아 정부가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나서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정부가 오로지 재정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는 점이다. 일자리만 하더라도 정부는 예산이 투입되는 일자리에만 노력을 쏟고 있을 뿐 민간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는 규제 완화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원격의료 도입과 수도권 규제 완화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이해관계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더 걱정스러운 점은 야당도 표를 의식한 경쟁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미래통합당 일각에서 거론되는 기본소득과 농산물 최저가격보장 입법안이 대표적이다. 그 누구도 재정 건전성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다. 이것이 40년 전 그리스의 모습과 뭐가 다른가.
그러잖아도 문재인 정부 들어 재정 건전성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그동안 불문율처럼 여겨졌던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 40%는 용도 폐기된 지 오래다. 현금 뿌리기 정책이 잇따르면서 올해 적자국채 발행 규모가 1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급속한 고령화 여파로 지금 수준의 복지를 유지해도 재정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는데 앞뒤 가리지 않고 복지 강화만 외치고 있으니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지 의문이다.
복지를 확충해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좋다. 문제는 재원이다. 늘어나는 복지를 감당하려면 증세가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정부는 복지 재원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그러면서 적자국채를 발행할 궁리만 한다. 적자국채는 공돈인가. 이는 미래세대가 갚아야 할 빚이다. 오죽하면 신용평가사인 피치 등이 국가 신용등급 추락을 경고하고 나섰겠는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의 최악 국면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일자리 감소로 글로벌 경제 수요가 급감한 가운데 코로나 2차 대유행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에 대비하려면 일단은 실탄을 아껴둬야 한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만 급급해서는 결코 경제를 살릴 수 없다. 길게 내다보고 지속가능한 정책을 펴야 한다. 기존 복지의 구조조정과 함께 보편적 증세에 대한 공론화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됐다. cso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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