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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병사부터 사신·여행객까지…800여년을 비춘 '盧溝曉月'

[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이야기] <5> 마르코 폴로도 사랑한 ‘노구교’

마르코 폴로 "세계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박지원도 열하일기에 "천하의 장관" 묘사

금나라 때 건설...베이징 서쪽의 관문 역할

明 이후 대운하 건설로 핵심수송로役 끝나

영정하 가로지른 아치형 다리 '옛풍치 물씬'

난간 장식한 다양한 모습의 사자석상 명물

베이징의 최대 하천인 영정하를 가로지르는 ‘노구교’의 현재 모습. 12세기에 건설된 이후 800여년의 세월을 지켜왔다. 오른쪽 멀리 완평성 서문의 성루도 보인다. 노구교의 여름 풍경이다.




중국 수도 베이징의 나이는 보통 명나라 영락제가 수도를 정한 지난 1420년부터 계산되기 시작한다. 물론 그전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고 유적이나 유물이 드물 뿐이다. 한족의 명나라가 몽골족 원나라의 흔적을 거의 지운 상태에서 베이징의 역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명나라 이전 문화유산으로 대표적인 것이 베이징 서남쪽 영정하(융딩허) 강에 걸려 있는 노구교(盧溝橋·루거우차오)다. 여진족의 금나라 때인 1192년에 세워졌으니 지금까지 800여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던 셈이다. 현재 다리의 길이는 266.5m, 폭은 9.3m다.

노구교가 완공되고 약 100년이 지난 후에 한 명의 이탈리아인이 찾아왔다. 바로 마르코 폴로다. 마르코 폴로가 구술로 남겼다는 ‘동방견문록’에서 노구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묘사된다. “길이는 거의 300보이고 폭은 8보여서 10명의 기사들이 나란히 갈 수 있다…잘 다듬은 회색 대리석으로 기초가 돼 있는데…기둥에는 매우 아름답고 크며 잘 만들어진 대리석 사자가 조각돼 있다.” 이후로부터 노구교는 ‘마르코 폴로 다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노구교에 대해 그 유럽인만 감탄한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 베이징을 방문한 사신들의 버킷리스트에는 노구교도 들어 있었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올 경우 동쪽에서 베이징에 진입해야 하는 사신들의 입장에서는 베이징성 밖 서남쪽으로 20㎞가량 떨어져 있는 노구교를 방문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그래도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베이징 유람을 하고 온 사람에게 천하 장관을 물으니…노구교 등을 말하더라”는 문장도 있다.

청나라 건륭제가 썼다는 ‘노구효월(盧溝曉月·노구교의 새벽달)’ 글씨가 비석으로 남아 있다.


중국 내에서는 더 유명했는데 베이징의 여덟 가지 명승고적을 일컫는 ‘연경팔경’ 가운데 ‘노구교의 새벽달(盧溝曉月·노구효월)’이 포함돼 있다. 노구교 바로 위로 비친 달이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현재는 대기오염으로 쉽게 보기 어렵다고 한다. 노구교 동쪽 입구에는 청나라 건륭제가 직접 썼다는 ‘노구효월’ 글자가 새겨진 비문이 있다. 여진족이 건설한 다리를 그 후손인 만주족이 와서 느끼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노구교가 중요한 것은 지정학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사에서 11세기까지 베이징은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베이징 서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이 영정하인데 이것도 그냥 중국에서 평범한 강 중의 하나였다. 그러는 가운데 금나라가 한족의 송나라를 장강 이남으로 밀어내고 이른바 중원 지역을 차지하면서 격변이 일어난다. 금나라는 만주와 중원을 동시에 경영했는데 베이징의 위치에 주목했다. 베이징 지역에 부수도인 중도(中都)를 세운 이유다.

중요한 도시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베이징이 정치·경제의 새로운 중심이 되면서 그 왼쪽을 흐르는 영정하를 안전하게 건너는 것이 필수적으로 됐다. 아마 영정하에 제대로 된 다리를 만든 첫 작품이 노구교였을 것이다. 금나라 병사들은 노구교를 건너 중국 정복에 나섰다. 원나라가 들어섰을 때도 이러한 상황은 계속됐다. 유라시아 대륙을 거슬러 온 마르코 폴로는 노구교를 지나 당시 대도(大都)라고 불린 베이징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노구교에는 다행이라고나 할까. 명나라 이후로 물류의 흐름이 바뀌었다. 지금의 장강 하류인 ‘강남’과 베이징을 연결하는 대운하가 베이징 동쪽 편에 완공되면서 노구교는 핵심 수송로에서 벗어났다. 다리의 원형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지금까지 남은 이유다.

대신 노구교의 최대의 적은 홍수였다. 영정하가 시도 때도 없이 범람하는 가운데 다리도 피해를 입었다. 청나라 강희제 때인 1692년 대대적인 치수사업이 펼쳐지고 이후에 강 이름도 영원히 안정됐다는 ‘영정하(永定河)’로 이름 붙여졌다.

상습 홍수 지역이었던 영정하에 지금은 거의 물이 흐르지 않는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시민에게 공급할 식수를 마련하기 위해 영정하 상류에 댐을 쌓았고 이후로 하류 쪽 물길은 말라버렸다. 다만 노구교 주위로는 강물이 보이는데 이는 다리답게 보이기 위해 부분적으로 물을 가둬놓았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현대에도 노구교는 외국인에게 거리감이 있다. 이 다리가 베이징 중심가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가 보면 옛 여행객들의 풍치를 느낄 수 있다.

노구교 난간을 ‘사자 석상’들이 장식하고 있다. 뒤로 영정하가 바짝 마른 겨울 풍경이다.


노구교는 총 10개의 교각 위에 11개의 아치형 교공을 만들어 안정감을 줬다. 노구교의 명물은 대리석 사자 석상이다. 다리의 양쪽 난간에는 1.4m 높이의 기둥이 세워져 있고 기둥 위에 조막만 한 사자 석상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각돼 있다. 기둥 하나에 한 마리가 있을 수 있고 여러 마리가 있는 경우도 있다. 여러 마리의 경우 작은 사자는 아마 새끼들로 생각된다. 엄마에게 어리광부리는 것 같은 아기사자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이는 이후 자금성은 물론 베이징 곳곳의 건물에 새겨진 사자상의 원형이 된 듯하다.

/글·사진(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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