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은 상인이 있었다. 어느 날 팔 물건을 싣고 항해하던 배가 침몰하면서 그는 큰 재산을 날리게 됐다. 낙담한 채 인근 도시의 거리를 헤매던 그는 무심코 어느 책방에 들렀는데 때마침 책방 주인이 낭독하던 철학책 내용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남자는 훗날 세계 철학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사상가가 됐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철학의 한 갈래인 스토아학파를 창시한 철학자 제노의 이야기다.
책이 우리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책과의 만남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책방이다.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인 제리 사인펠드는 “책방은 사람들이 여전히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유일한 증거들 중 하나”라고 했는데 제노의 일화를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그런데 요즘 서점들이 아우성이다. 국내 2위의 서적 도매업체 인터파크송인서적이 또 폐업 위기에 처하면서다. 지난 2016년 말 부도를 내 서점·출판업계를 발칵 뒤집었던 송인서적은 이듬해 인터파크에 인수돼 기사회생했지만 고질적인 경영난에 인터파크가 결국 손을 떼기로 하면서 8일 법원 회생절차를 신청했다.
도매업체의 위기는 책을 만들어 납품하는 출판사나 공급받는 서점 모두에 타격이지만 특히 책 공급을 한 곳의 도매상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온 중소서점들에는 그 피해가 유독 클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대형·온라인 서점에 밀려 설 곳이 없었던 지역의 중소서점들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치명상을 입혔다. 수개월째 이어지는 거리두기로 책을 집어 든 이들은 많아졌다. 국내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의 경우 1·4분기 매출이 7%가량 증가했다고 한다. 온라인 매출 호조가 오프라인 판매 부진을 상쇄한 덕이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동네 책방들에는 남 얘기일 뿐이다. 저자 강연이나 북토크·북클럽 등 동네 서점들이 플랫폼 역할을 했던 이벤트가 줄줄이 취소되고 비대면 소비가 급증하면서 동네 책방을 찾는 발길은 뚝 떨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크고 작은 서점들이 문을 닫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여기에 송인서적 위기로 출판계 생태계의 혼란까지 덮치면 버텨낼 재간이 없다.
주인이 권하는 책과 우연한 만남
나만의 ‘보물’을 찾아내는 설렘 등
대형서점·온라인엔 없는 재미 가득
생존 이어가도록 지원방안 마련을
물론 동네 책방이 아니라도 책은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것도 훨씬 편리하고 더 싸게. 자본으로 무장한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에는 동네 책방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책들이 구비돼 있다. 접근성도 좋고 온라인으로 사면 가격도 싸다. 게다가 하루 만에 집으로 배송까지 해주니 굳이 동네 책방을 찾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동네 책방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곳이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쾌적한 환경에 베스트셀러를 일목요연하게 진열한 대형 서점이나 클릭만으로 원하는 책을 가져다주는 온라인 서점은 편리하고 효율적이지만 누구도 모를 나만의 ‘보물’을 찾아내는 설렘을 주지는 못한다. 안목 좋은 책방 주인이 권하는 책 한 권과의 우연한 만남,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간의 지적인 소통과 거기서 느끼는 정서적 풍요로움, 문화적 충만감을 주는 것은 동네 책방의 몫이다.
그러니 더 이상 동네의 작은 서점들의 위기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균형 잡힌 출판 생태계를 구축하고 중소서점들이 생존을 이어갈 수 있도록 다각도에서 지원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서점들의 적극적인 자구노력도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올 초 한 서점이 ‘공룡’ 아마존에 맞서기 위해 독립서점들을 규합한 온라인 독립서점 연합체를 출범시켜 놀라운 성과를 올리고 있다. 현재 미 전역에서 750개 서점이 참여해 올해에만 500억원 규모의 온라인 매출을 올릴 전망이라고 하니 국내 서점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독자들의 역할이다. 서점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고착화된 독서인구의 감소다. 짤막한 동영상들이 쏟아내는 정제되지 않은 정보와 자극적 재미에 젖어 책이 주는 즐거움을 잃어버린다면 서점에도 우리 사회에도 미래는 없다.
klsin@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