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투사’의 앞 머리카락에는 과거에는 보기 어려웠던 엷은 컬이 생겼다. 한 번씩 머리카락을 쓸어올릴 때는 ‘영국신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결 부드러워진 눈을 강조하듯 그는 트레이드마크인 ‘동그란 안경’을 때때로 벗었다. ‘따 놓은 당상’이었던 금융투자협회장 연임도 포기하고 “현 정부와는 결이 다르다”는 결기를 보여줬던 게 불과 3년 전. 한미협회장으로 돌아온 황영기 전 금투협회장은 흡사 영화 ‘인턴’의 로버트 드니로와 닮아 있었다. 황 회장은 지난 1975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삼성전자 자금팀 등을 거쳐 삼성투자신탁운용 사장, 삼성증권(016360) 사장 등을 지냈다. 검투사라는 별명은 삼성증권 사장 시절 “회사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 검투사의 자세로 일하겠다”고 말한 후 그를 줄곧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됐다.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이건희 삼성 회장의 전담 통역을 10년 넘게 맡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어 우리금융지주(316140) 회장 겸 우리은행장, KB금융(105560)지주 초대 회장에 이어 금투협회장까지, 한 사람이 거친 금융사 최고경영자(CEO)의 이력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그. 백전노장의 황 회장은 이제 후배들에게 노하우와 풍부한 인생경험을 전하며 봉사하는 ‘좋은 선배’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23일 법무법인 세종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디타워에서 만난 황 회장은 “영원한 기업인으로서의 봉사”를 강조했다. 그는 “능력이 된다면 의미 있는 일에 재능기부를 통한 봉사를 하는 게 성공한 기업인들의 임무”라고 말문을 열었다. 올 2월 선임된 한미협회장도 민간단체장으로 무보수 봉사직이다. 한미협회는 1963년 창립된 이후 고(故) 구평회 E1 명예회장, 고(故)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 등이 맡았고 황 회장 직전 박진 전 의원이 이끌었다. 한미 양국 간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현안 세미나 및 양국 친선의 밤 행사 개최 등 교류협력 사업 등을 하고 있다. 황 회장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한미동맹이라는 대한민국의 기본 축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서 한미관계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관되게 ‘금융인’ ‘기업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한미협회장은 다소 낯설어 보였지만 그는 한미관계뿐만 아니라 주거·교육·의료 문제를 비롯해 정치권과 금융산업 전반의 수준 높은 ‘솔루션’을 갖고 있었다. 정치·경제 전반의 산적한 문제와 해결책들을 듣다 보니 ‘정치에 뜻’이 있어 보였지만 황 회장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기업인이고 시장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황 회장은 “과거 정치권 부름도 있었지만 내 의지대로 의정활동이 가능하려면 3선 정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지역구를 챙겨야 하고 당론에 따라야 하고 ‘국가적 어젠다’를 고민할 시간이 없게 된다”며 “정치권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다”고 강조했다. 21대 국회에 홍성국 전 대우증권 사장과 이용우 전 카카오뱅크 대표 등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들이 입성했다고 하자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반길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보수와 진보 모두 당이 개방적이고 새로운 인재 영입을 통한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며 “기업과 행정·정치가 서로 수준이 맞아서 국가 수준이 올라가는 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금융 출신 의원들에게 밥 사주면서 계속 잔소리를 하는 것도 선배의 의무”라며 “앞으로 민간에서 행정부나 국회로 들어가는 일이 활발하게 이뤄져 밥 살 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황 회장은 “시장에서 컸다는 자부심과 시장이 국가를 먹여 살린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인과 공무원은 말 그대로 공복이지 않느냐”며 “시장의 자율성을 강하게 주장하다 보니 정부나 정치권에서 예쁘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투협회장 연임을 포기했을 당시 그는 스스로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외교상 기피인물)’라고 했다. 이제는 민감했던 질문에 답할 수 있지 않을까. 현 정부에서 금투협회장 사퇴 압박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당시 국회의원들과 정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던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속마음을 내비쳤다. “시장을 모르는 사람들, 금융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과 3년 더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며 “젊고 더 의욕적인 사람이 금투협회장을 맡아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후배 금투협회장이 업무 파악과 대정부, 대국회를 상대로 설득하는 데 보다 빠른 연착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일환으로 임기 3년 차에 차근차근 자본시장 혁신 100대 과제를 정리해 후임 회장에게 넘겨줬다. 이후 증권거래세가 폐지됐고 사모펀드의 판단 기준이 청약 권유자 수에서 실제 청약자 수로 개편됐다. 대기업을 제외한 비상장 기업의 소액주주 주식거래 양도세도 면제됐다.
자본시장뿐만 아니라 은행에서도 지휘봉을 잡았지만 황 회장에게 아픈 손가락은 여전히 자본시장이었다. 증권사가 은행 등 국내 다른 금융기관보다 불합리한 대접을 받고 있다며 제기한 ‘기울어진 운동장론’은 그에게는 여전히 유효했다. “자본시장은 업의 특성상 수렵행위를 한다면 보험과 은행은 경작을 하고 있다”며 “결국 확장성과 발전성은 자본시장에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자본이 축적되면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의 돈은 더욱 커져 자본시장은 더 큰 발전을 할 수밖에 없다”며 “다만 도덕적 해이와 관련해서는 엄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제약과 규제는 최대한 없애야 한다”며 “레버리지 비율도 최대한 풀어줘야 한다. 은행과 달리 증권과 자산운용사는 망하더라도 사회에 미칠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은 만큼 정부 당국이 한 걸음 떨어져서 보고 금융사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은행도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몇몇 기업에서 인터넷은행 진출을 상의했지만 ‘규제’로 인해 메기 역할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며 “기존 은행의 미래는 디지털 전환에 달렸지만 외부 규제와 함께 은행 자체적으로도 인력과 조직 전환을 빠르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원한 기업인으로서 봉사하겠다”는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금융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눈빛은 다시 검투사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일을 할 때는 즐거워서 해야 한다. 그래야 열정이 끓어 오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황 회장이 우리금융의 맞수인 KB금융 회장에 도전한 것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004년 3월 삼성그룹을 떠나 우리금융 회장 겸 우리은행장에 올랐던 그가 2008년 7월 KB금융 회장에 오르자 금융권이 술렁였다.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보수적인 은행 문화에서 경쟁사 회장에 지원한 것 자체가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경쟁에 뛰어들자 많은 사람은 해보나 마나 한 승부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황 회장은 자신 있었다. 왜 자신이 KB금융 회장으로 더 유능한지 얘기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심이 선 후 그는 휴대폰 하나 들고 KB금융 사외이사들을 만났다. 그리고 왜 자신이 KB금융 회장직을 경쟁자보다 잘 수행할 수 있는지를 하나하나 설명하고 다녔다. 3차까지 이어진 치열한 경쟁 끝에 회장직에 올랐다. 이번 인터뷰에서 처음 밝힌 확실한 비기는 ‘초(超)메가뱅크’라는 청사진이었다. 상황이 무르익으면 노무라·미쓰비시·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투자은행(IB)들과 견줄만한 은행을 만들겠다는 의지와 전략이 있었다. ‘왜 당신이어야만 했냐’고 묻자 “소명”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청년들에게도 그는 “‘와이 미(Why me). 왜 나여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 회장은 “예컨대 취직 면접 때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당신을 위해서 이것을 할 수 있다고 대답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며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최근 ‘진보집권플랜(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과 ‘경제 알아야 바꾼다(손혜원이 묻고 주진형이 답하다)’를 읽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헌재 전 부총리의 대담록 ‘국가가 할 일은 무엇인가’도 그의 독서 목록에 포함됐다. 진보 인사들의 책에서 현 상황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또 그는 이건희 회장의 통역을 맡을 정도로 인정받은 영어 실력이 녹슬지 않도록 영자신문과 TBS교통방송 영어채널을 꾸준히 듣고 있다고 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라는 틀에 갇히기보다 ‘상식’과 ‘실용’에 근거한 자기 혁신. 황영기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대한민국 성장축 흔들리지 않게 한미 민간교류 강화" |
황 회장은 지난 2월 제7대 한미협회장으로 선출되면서 “한미관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도록 민간 부문에서 할 일을 찾겠다”며 열정을 보였다. 그는 “금투협회장에 선임될 때보다 더 많은 축하인사를 받았다”며 “국민들의 한미관계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평생 금융인으로 살아온 황 회장이 한미협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그가 철저한 시장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굳건한 한미동맹이 대한민국 성장의 3대 축”이라며 “헌법 못지않게 3대 축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데 한미협회의 역할이 크다”고 강조했다.
황 회장은 문화·금융·미디어·법률 등 협회 내 분과위원회의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그는 “그동안 한미협회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 대한 기사 중 의미 있는 기사를 추려 번역본과 원문을 회원들에게 보내고 있다”며 “이런 활동과 함께 1년에 한 번씩 책으로 내고 연말에 미 대사, 사령관을 비롯해 한국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초청해 ‘한미친선의 밤’ 행사를 개최해 우호증진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한미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인데도 20여개 분과위가 제 역할을 못한 측면이 있어 개편할 계획”이라며 “예를 들어 문화예술 분과에서는 방탄소년단 등 K팝과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등으로 대표되는 K무비 등을 다뤄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향상시킬 방안 등을 논의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한류를 활용한 국가 이미지 제고에 그치지 않고 미국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돕는 방안도 찾고 있다. 교육 분야에서도 민간섹터의 역할이 있다고 그는 자신하고 있다. 그는 “교육 분야에서는 유학생들의 장학금과 비자 문제 등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고, 과학 분야는 국내 벤처들과 실리콘밸리를 연결하는 역할도 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한미협회를 통해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굳건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한미동맹이다. 황 회장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흔들려서도 안 되지만 특히 한미동맹이 흔들리면 어려워진다”며 “북한과 군사적 긴장관계가 여전하고 중국과 러시아도 그 뒤에 있어 그들로부터의 방어를 통해 한국의 번영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모든 토대는 한미동맹을 통한 힘의 균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굳건한 한미관계를 위해 민간 부문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며 “암참(주한미국상공회의소)이나 다른 기관들과의 교류도 활성화 시켜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종호기자 joist1894@sedaily.com 사진=이호재 기자
He is
△1952년 경북 영덕 △1971년 서울고 졸업 △1975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81년 런던정경대 석사 △1975년 삼성물산 경공업사업본부 입사 △1982년 뱅크트러스트 아시아담당 부사장 △1989년 삼성그룹 비서실 국제금융팀장 △1997년 삼성생명 자산운용본부장 전무 △1999년 삼성투신운용 대표 △2001년 삼성증권 대표 △2004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2008년 KB금융지주 회장 △2010년 차병원 총괄부회장 △2015년 한국금융투자협회장 △2020년 한미협회장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