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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ILO 협약 선비준 없다" 확언에도 재계가 불신하는 이유

"거대 여당이 밀어붙이면 게임 끝" 목소리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안을 다시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정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동관계법 개정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경영계는 ‘선비준’을 우려하고 있다. 노동법 개정 절차가 지지부진할 경우 176석을 확보한 거대 여당이 비준동의안을 먼저 처리할 것이란 전망이다.

정부는 7일 국무회의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안 3건을 심의·의결했다. 결사의 자유 관련 협약(87호·98호)과 강제 노동 관련 협약(29호) 등이다. 105호는 정치적 견해 표명·파업 등을 한 사람에게 강제 근로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국가보안법과 상충할 우려가 있어 비준 대상에서 제외됐다. 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은 “ILO 핵심협약에 대해 기대뿐 아니라 걱정도 많으실 것”이라며 “그렇지만 ILO 핵심협약 비준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격과 국익을 위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달 중 비준안을 국회에 제출한 후 올해 안에 비준 동의를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ILO에 핵심협약 비준안이 제출되면 1년 후 효력이 발생한다. 경영계에는 그 기간 내에 노동법을 개정해야 하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은 실제 이날 ILO 핵심협약 선비준을 요구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ILO 핵심협약 비준 및 국회의 비준동의에 앞서 관련 국내법제도의 정비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며 “관련 법률의 개정을 위한 논의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ILO 손도 못 댄 20대 국회…노동계 vs 재계 ‘장외 설전’
경영계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선비준’에 대한 우려는 21대 국회의 현재 지형도에서 기인한다. 20대 국회 당시는 선비준이 노동계가 목소리를 높이는 장외 설전 양상에서 멈췄다면 21대 국회에서는 여당이 176석을 확보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선비준 카드로 경영계를 압박할 수 있다. 정부 여당이 실제 선비준을 밀어붙인다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쇼크로 인한 경영 악화로 가뜩이나 첨예한 노사관계가 더욱 악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고용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조법 등 노동관계법 개정안 추진 의사를 밝힌 것은 지난 5월이다. 이후 국무회의를 거쳐 각각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와 환경노동위원회로 올라갔지만 사실상 별다른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다. ILO 핵심협약의 ‘키’를 쥐고 있는 환노위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특별연장근로 인가 대상 확대 등 주 52시간 근로제 보완 입법에 몰두해 있었고 선거법 개정안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두고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정면으로 대치했기 때문이다.

국회를 둘러싸고 노사는 ‘선비준’에 대한 장외 설전을 벌였다. 선비준을 강력하게 주장한 곳은 민주노총이다. 민주노총은 지난해 5월 “국회는 ILO 핵심협약 비준동의안을 받는 즉시 동의하라”는 입장을 낸 후 잇따라 집회·시위를 개최해 국회를 압박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세계적으로 우리 국가경쟁력에 최대 걸림돌로 평가되고 있는 대립적·갈등적·불균형적 노사관계와 노동법제 속에서 단결권만 확대할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과 사용자 측의 우려가 매우 높다”며 노동개혁 차원에서 사안을 다뤄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 ‘선비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선 노동법을 손본 후 비준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에둘러 밝힌 셈이다.

선비준-후입법 나설 경우 파장은
노동계의 상황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대 국회에서 ILO 비준동의안과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모두 폐기된 후 고용부가 21대 국회 재추진을 준비하자 민주노총은 입법예고 때인 5월과 노동관계법 국무회의 통과 때인 지난달, 그리고 ILO 비준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이날 모두 ‘선비준하라’는 입장을 냈다.



민주노총이 선비준 의사를 밝히는 이유는 노조법 개정에 소극적인 재계를 압박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분석된다. ILO 핵심협약 비준안은 ILO에 제출된 후 1년이 지나면 효력이 발생한다. 만약 그 이후에도 노동관계법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근로시간면제제도, 해고자 노조 가입 금지 등이 규정된 현행 노조법과 ILO 핵심협약이 상충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재계의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1년 안에 노동관계법 개정에 동참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경영 불확실성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더욱이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의 주요 이유로 내세운 유럽연합(EU)과의 무역갈등 우려도 사실과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현재의 한·EU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보면 ILO 기본협약 비준은 무역분쟁이 되기 어렵다”며 “FTA 협정에서 전문가 패널 외 더 이상 제재 조치를 규정하지 않았고 ILO 기본협약 비준도 노력 의무를 부과했을 뿐 8개 협약을 언제까지 비준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분쟁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협정의 국회 비준 과정에서도 점검됐고 EU 측도 분쟁으로 다룰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이러한 내용은 여러 문건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ILO 핵심협약이 선비준된다면 노동계는 노조법을 더 유리하게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노총은 지난달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노조법 2조를 개정해 특수근로종사자 등의 노동 3권을 보장하고 ‘비종사자 조합원(기업별 노조의 임원자격은 종사 근로자로 제한)’ 개념을 삭제해 해고자의 노조 활동을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현재 국회에 제출된 노동관계법 개정안보다 훨씬 더 노동계에 유리하다.

코로나19 쇼크가 제조업으로 번지는 상황에서 정부의 시간표대로 선비준에 나선다면 가뜩이나 위태로운 노사관계는 더욱 험악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달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매진해야 하는 시점에 ILO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하는 것은 큰 충격”이라며 ‘코로나19 위기극복을 위한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양대 노총은 “사회적 대화를 하자는 거냐, 말자는 거냐”며 반발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만약 ILO 핵심협약이 선비준된다면 시간에 쫓겨서 억지로 법 개정을 해야 할 상황이 발생해 합리적 노사관계의 전제조건에 대한 논의 자체가 실종될 수 있다”며 “가급적이면 법 개정 논의를 통해 핵심협약 비준의 파급효과, 부수적 영향을 분석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이해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을 거쳐 협약 비준에 이르는 것이 바람직한 경로”라고 말했다. /세종=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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