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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만발 포탄 쏟아 부은 백마고지전투[김정욱의 밀톡]

‘철의 삼각지’ 중심축 선점 위해 국군-중공군 혈전

12차례 전투 치르고 국군이 백마고지 완전 탈환

백마고지전투 전적비.




오는 27일 정전협정 67주년을 맞는 가운데 6·25전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백마고지전투’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에 있는 백마고지를 두고 국군이 북한을 지원하는 중공군(중국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전투다.

백마고지는 옛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의 중심축으로 이곳을 선점하면 중부전선과 의정부 인근까지 장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대 요충지로 꼽혔다.

당시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터가 된 백마고지는 해발 395m 밖에 되지 않은 낮은 고지였다.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고 있을 때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다. ‘395고지’라고도 불리는 백마고지에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은 혈전을 벌였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원들이 백마고지전투에서 전사한 국군 유해를 수습한 뒤 묵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공군은 1952년 10월 6일 고지 주봉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했다. 이에 국군 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줬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에서 중공군은 많은 병력 손실을 입었다.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국군의 반격으로 고지를 재탈환했다. 이후 국군은 10월 15일까지 치열한 육탄전을 전개해 고지를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국군과 중공군은 모두 12차례 전투를 치렀고, 그 과정에서 고지는 군인들의 시체들로 가득 찼다. 이때 헬기에서 고지를 내려다본 국군은 “그 푸르던 산이 하얗게 변했다.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고, 이때부터 이곳은 ‘백마고지’라고 불렸다. 6·25전쟁에서 가장 끔직한 전투로 기록된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공군은 1만여명, 우리군은 3,4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열흘간 치러진 고지 쟁탈전을 위해 당시 국군과 중공군은 27만여발의 포탄을 투하됐다. 이에 해발 395m 였던 고지가 1m 가량 내려앉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백마고지전투 이후 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칭호를 얻었다. 육군 관계자는 “백마고지전투는 세계 전쟁사에서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될 정도”라며 “당시 이 전투는 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지휘능력을 적에게 과시한 대표적 전투”라고 말했다.

중공군으로부터 백마고지를 지켜낸 9사단은 1966년 맹호부대에 이어 베트남 파병 부대로 선정돼 베트남 닌호아·투이호아·캄란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김정욱기자 myk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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