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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839년 '가장 추악한 아편전쟁'

패배한 中, 英과 불평등조약

영국이 무역역조를 뒤엎기 위해 중국에 뿌린 아편을 둘러싼 갈등은 끝내 전쟁으로 번졌다. 중국 전선들이 영국 증기군함의 포격에 피격되는 모습. /위키피디아




1839년 9월4일 정오 무렵, 중국 광둥성 주룽(九龍). 영국 측이 중국에 서신을 보냈다. ‘영국 함정에 식량과 물 공급을 재개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중국은 가볍게 물리쳤다. 명분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술 취한 영국 수병의 중국인 농부 살해 사건. 광둥 흠차대신(전권대신) 린쩌쉬는 영국 해군에 대한 식량과 물 공급을 끊고 살해 용의자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영국은 중국의 요구를 거부한 채 오히려 협박에 나섰다.

영국은 급기야 무력을 썼다. 500톤급 6급 프리깃 한 척만으로 정크선 두 척을 깨버렸다. 1842년 8월 말까지 3년 동안의 제1차 아편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시기는 이듬해 3월 하순. 의회에서 전쟁을 결의하고 병력을 보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나온다. ‘의회의 개전 결의 이전에 아편전쟁이 시작됐을까.’ 그렇다. 민간에 의해서다. 중국에 협박문서를 전달한 인물은 통역을 자처한 독일인 귀츨라프(당시 36세). 선교사였지만 아편을 선교 수단으로 여기고 뒤로는 밀무역으로 큰돈을 번 사람이다.

협박문서를 쓴 장본인도 해군 소속이 아니다. 1834년 동인도회사의 대중 무역 독점권이 중지된 직후 영국 정부가 현지에 파견한 상인 대표가 협박장을 보내고 배정된 군함을 이용해 중국 전선을 침몰시켰다. 아편 무역을 강경하게 단속해온 린쩌쉬는 대놓고 도발해온 영국인 상인 전원을 내쫓았다. 영국인들은 속으로 웃었다. 아편 무역을 금지하며 불법 아편을 몰수해온 린쭤쉬를 제거하고 청을 압박할 기회로 여긴 것이다.



런던에 돌아온 상인들은 정계를 들쑤시며 응징론을 펼쳤다. 결국 영국은 글래드스턴 의원의 ‘유사 이래 가장 불명예스럽고 비도덕적인 전쟁’이라는 비판에도 대규모 군대를 보냈다.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패배한 청나라는 홍콩을 할양하고 관세권과 영사 재판권을 내주는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영국이 민간과 정부를 가리지 않고 명분 없는 싸움에 나선 이유는 돈. 중국산 차를 사는 데 막대한 은이 지출되자 무역역조를 메우려 아편을 팔았다.

연간 200상자에 그치던 아편이 4만상자로 늘어나 보건과 무역수지 방어에 나선 중국이 규제하자 영국은 전쟁까지 벌였다. 1차 아편전쟁이 너무 빨리 끝났다고 아쉬워했던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문화재를 약탈하고 이권을 빼앗았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1세기에 걸친 침략에 시달렸던 중국은 개방에 나선 이후 외화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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