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나라’ 신라 왕족의 식탁은 그들의 장신구 못지 않게 호화로웠다. 복어 요리와 성게, 고래 고기에 남생이까지 놓였다. 말 그대로 ‘화려한 밥상’이었다.
신라 왕족의 무덤 중 하나로 서기 500년 무렵에 만들어진 경주 서봉총 발견된 무덤주인을 위한 제사음식을 통해 당시 권력층 및 부유층의 식문화를 유추할 실마리가 마련됐다. 제사 때는 망자(亡者)가 생전에 좋아하는 음식으로 평소보다 더 풍성하게 차렸던 것은 그때나 요즘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926년과 1929년에 걸쳐 일제가 조사했던 경주 서봉총을 2016~2017년 재발굴한 성과 보고서를 간행했다고 7일 밝혔다.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에 있는 경주 서봉총은 서기 500년 경 조성된 신라 왕족의 무덤 중 하나다. 두 개의 봉분이 맞닿은 형태인 쌍분으로, 먼저 만들어진 북분(北墳)에 남분(南墳)이 나란히 붙어 있다. 조사 당시 스웨덴(瑞典) 황태자가 조사에 참여했고 봉황(鳳凰) 장식의 금관이 출토됐기에 무덤 이름이 서봉총(瑞鳳塚)으로 붙었다. 서봉총은 금관부터 수많은 황금 장신구와 부장품이 출토되는 등 학술적 가치가 높았지만 당시 일제가 발굴보고서를 간행하지 않았다. 고고학계에서 이 같은 문제를 숙제로 여겨오던 중, 국립중앙박물관은 2014년 서봉총 출토품 보고서를 간행하고 이어 재발굴한 후 그 성과 보고서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진행한 재발굴의 1차적 성과는 일제가 밝히지 못한 무덤의 규모와 구조를 정확하게 확인한 것. 일제는 북분의 직경을 36.3m로 판단했으나 재발굴 결과 46.7.m로 밝혀져 당시 조사에 오류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또 서봉총의 무덤 구조인 돌무지덧널무넘(積石木槨墓)의 돌무지는 금관총과 황남대총처럼 나무기둥으로 만든 비계 틀(木造架構)을 먼저 세우고 쌓아올렸음이 최초로 확인됐다.
무덤 둘레돌(護石)에 큰항아리를 이용해 무덤 주인에게 음식을 바친 제사 흔적이 고스란히 발견됐다. 당시 신라에서는 무덤 주인을 위해 귀한 음식을 여러 개의 큰항아리에 담아 무덤 둘레돌 주변에 놓고 제사지내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 또한 이번 재발굴을 통해 알게 된 성과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김대환 학예연구사는 “이러한 제사는 일제강점기 조사에서도 확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역사 기록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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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서봉총 남분의 둘레돌에서 조사된 큰항아리 안에서 동물의 뼈·이빨·뿔·조가비 등 1,500년이 지나는 동안 사라지지 않고 남은 동물 유체를 통해 당시 제사 음식의 종류를 확인한 것은 이번 재발굴의 획기적 성과다. 큰항아리 안에서 종(種)과 부위를 알 수 있는 동물 유체만 총 7,700점 확인되었다. 이 중 조개류가 1,883점, 물고기류가 5,700점으로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주 특이하게바다포유류인 돌고래, 파충류인 남생이와 함께 성게류가 확인됐다. 신경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먹기 어려운 복어도 발견됐다. 김 학예연구사는 “이번에 확인된 동물 유체들은 신라 무덤제사의 일면을 밝힐 수 있는 정보이기도하지만 한편으로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라며 “동물 유체에서 연상되는 복어 요리, 성게, 고래 고기는 당시 신라 왕족들이 아주 호화로운 식생활을 즐겼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발견된 식재료를 통해 무덤 축조 시기도 추론할 수 있다. 조개는 산란기 때 독소가 있어 식용하지 않고, 많이 확인된 청어와 방어는 회유시기가 있다. 김 학예사는 “이를 통해 식재료가 된 어패류의 대부분은 가을철에 포획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이 제사가 무덤 축조 직후에 실시된 점을 고려하면, 서봉총의 남분은 가을에 완성됐을 가능성이 크고 이는 향후 서봉총 북분과 남분의 주인공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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