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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812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입성

경제전략 부재· 병참 실패로 몰락

모스크바에 입성하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보급과 병참을 유지하지 못해 끝내 몰락하고 말았다. /위키피디아




1812년 9월14일 오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모스크바에 들어왔다. 개전 83일 만이다. 프랑스군은 승승장구했으나 내상이 깊었다. 비전투 손실이 컸던 탓이다. 모두 69만명의 원정군 가운데 침공주력은 약 40만명. 크고 작은 전투에서 6만~7만명을 잃었지만 모스크바에 약 11만명이 도달했다. 무려 23만여명이 굶거나 병들어 죽지 않으면 도망쳤다. 군세가 크게 줄었어도 나폴레옹은 주눅 들지 않았다. 러시아의 항복은 시간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진흙과 바위투성이인 동유럽과 달리 모스크바는 화려했다. 이국적인 성당과 금도금 궁전으로 휘황찬란했던 모스크바의 인구는 약 27만명. 석조주택이 2,567채, 목조주택이 6,584채, 공장도 464개소나 있었다. 러시아군과 시민들은 하루 전에 급히 철수한 상황. 프랑스군은 보급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황제나 고위귀족이 찾아와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선심도 베풀었다. 자유예배를 보장하고 고아원과 양로원에 위조한 러시아 지폐를 내려줬다.

기대와 달리 누구도 찾아오지 않은 가운데 시내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화인은 방화. 모스크바 주지사 로스톱친은 후퇴 직전 소방도구를 빼내고 불을 질렀다. 목조주택 대부분이 불탔다. 크렘린 궁전 인근까지 화재가 번져 나폴레옹도 침소를 급히 시 외곽으로 옮길 정도였다. 러시아의 항전 의지를 보고서도 나폴레옹은 10월19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병사들은 약탈에 정신이 팔려 서로 싸웠다. 모스크바 퇴각 무렵 병력은 10만명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패주를 거듭한 나폴레옹은 파리로 겨우 도망쳤으나 살아서 돌아온 장병은 불과 4만명. 온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의 기세는 러시아 원정 실패로 꺾이고 말았다. 잠깐 재기하는 것 같았어도 러시아에서 상실한 기병과 포병의 공백을 메울 길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추위를 패전 요인으로 꼽았지만 정작 기후는 상대적으로 따뜻했다. 진짜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첫째, 어느 때보다 만전을 기울였다는 보급과 병참에 이상이 생겼다.

둘째 이유는 보다 원천적이다. 나폴레옹의 당초 의도는 영국에 대한 경제봉쇄. 러시아를 대륙봉쇄령에 묶어두려고 했으나 반발을 불렀다. 농노가 생산하는 잉여곡물을 영국에 수출하는 토지귀족들의 불만이 컸다. 경제적 갈등이 전쟁을 잉태한 사례는 옛날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마주친 현실이다. 안보동맹인 미국이 경제동맹인 중국을 몰아붙이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까 걱정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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