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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의 아내 아닌 '예술가 박래현'을 만나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중통역자'展

독자 화풍 개척 동양화·추상화서

태피스트리·판화로 영역 확장

탄생 100주년 기념해 재조명

'노점'·'영광' 등 138점 총출동

박래현의 1957년작으로 그 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노점’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아침 6시쯤 일어나 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 닭의 치다꺼리, 아기 보기, 정오면 점심 먹고, 손이 오면 몇 시간 허비하고, 저녁 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자 그러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나 그리나.”

워킹맘이 특히 공감할 이 문장은 화가 박래현(1920~1976)이 결혼 직후인 1948년 한 잡지에 기고한 수필 ‘결혼과 생활’의 일부다. 시시콜콜한 생활상에서 화가이자 아내, 엄마로서의 고충이 배어난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대지주의 큰딸로 태어난 박래현은 6살 때 군산으로 이주했고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입학했으니 천경자의 1년 선배가 된다. 박래현은 유복한 환경에서 일찍이 첨단 문물을 접한 ‘신여성’이었다. 대학 4학년 때 그에게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을 안긴 출세작 ‘단장’은 하숙집 딸을 모델로 했지만 화려하고 주목받던 박래현 자신일 것이라 상상해도 될 법하다.

박래현의 1943년작 ‘화장’. 일본 유학의 영향으로 ‘일본화(畵)’ 경향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당시 시상식을 위해 귀국했다가 운명처럼 운보 김기창(1913~2001)을 만났다. 화가라는 점을 제외하면 둘은 너무나 달랐다. 가난한 집안, 볼품없는 학벌, 청력 상실의 장애를 지닌 김기창과 대학까지 나온 부잣집 딸 박래현이 부부가 됐다. 결혼 이듬해인 1948년부터 1971년까지 총 12회나 열린 둘의 ‘부부전’은 당시에도 화제였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대단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박래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기획해 덕수궁에서 최근 막 올린 ‘박래현, 삼중통역자’는 그간 ‘김기창의 아내’라는 이름 아래 묻혔던 우향(雨鄕) 박래현을 다시 보게 하는 자리다. 유학시절 작품부터 일본화(畵) 영향을 극복한 초기 동양화,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하며 추상으로 옮겨간 그림을 비롯해 판화와 태피스트리 등 138점이 총출동했다. 지난 1985년 호암미술관(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신)의 10주기 전시 이후 35년 만의 대규모 전시다.

우향 박래현과 운보 김기창이 1957년에 합작해 그린 ‘봄C’ /작품소장=아라리오컬렉션


박래현은 1·4후퇴 이후 군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며 급격한 화풍 변화를 보인다. 1956년 6월 대한미술협회전의 ‘이른 아침’과 11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노점’이 잇달아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은 네 아이의 엄마가 남편 수발을 하면서 거둔 쾌거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노점’이다. 조각보 오려내듯 기하학적으로 분할한 색면에서 피카소·블라크 등의 입체주의 영향이 엿보인다. 여기다 세련된 색상을 맑게 처리하고 예리한 필선으로 실험성과 현대적 감각을 뽐냈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봄C’는 남편과의 합작품이다. 박래현이 등나무를 그린 후 김기창이 참새를 그리고 글을 썼다.

박래현의 1963년작 ‘잊혀진 역사 중에서’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들은 1957년 말 ‘백양회’라는 한국화 동인을 결성했고 1960년대에 본격적인 ‘동양화의 추상’을 시도했다. 1963년작 ‘잊혀진 역사 중에서’를 비롯해 붉은색·노란색·검은색 등 강렬한 색채가 한지에 흠뻑 스미고 번져나가는 효과가 깊은 울림을 전한다. 즉흥적일 듯하지만 작업에 앞서 치밀한 공간·색채 계획이 있었다는 점을 함께 전시된 자료들이 보여준다. 1965년 미국 순회 부부전을 마치고 유럽여행을 한 후, 작품세계에 또다시 지각변동이 인다. 1967년 상파울루비엔날레 한국대표로 출품한 ‘영광’은 고대문화와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태양의 생활력을 등황(짙은 노랑)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생명을 고대주의 피(붉은색)로, 그러나 타산을 벗어날 수 없는 시대의 신중성을 흑빛(검은색)의 침묵으로, 3색의 하모니는 하나의 언어로 백지 위에 나를 대변해 주었다.” (1967년 쓴 ‘반생(半生)에 서서 지금까지’ 중에서)

박래현의 1967년작 ‘영광’ /작품소장=국립현대미술관


이후 박래현은 아예 뉴욕에 눌러앉아 태피스트리와 판화를 연구했다. 1974년 귀국해 그간 연구한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려 했으나 병마가 덮쳐 1976년 1월 간암으로 타계했다.

전시제목인 ‘삼중통역자’는 중의적이다. 미국 여행 당시 박래현이 여행가이드의 영어를 우리말로, 이를 다시 김기창이 알아들을 수 있는 구화와 몸짓으로 설명하는 것을 스스로 “삼중통역자와도 같다”고 표현한 적 있다.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에서의 ‘삼중통역’은 회화, 태피스트리, 판화라는 세 가지 매체를 넘나들며 연결지었던 박래현의 예술 세계로 의미를 확장했다”고 밝혔다. 내년 1월3일까지 덕수궁 전시 후 청주관 순회전으로 이어진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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