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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담] 文 '탈원전' 한 마디에 영혼까지 삭제한 공무원들

■윤경환의 국정농담(國政濃談)

감사원, "월성 1호기 경제성 낮췄다"면서도

조기폐쇄 타당성 당부는 판단 안해 균형 도모

의사결정 과정서 뚜렷한 靑의식 정황은 논란

백운규, 대통령 질문 보고에 "즉시 중단" 지시

'한수원 부당 평가' '자료 삭제' 등 나비효과로

여야 충돌 속 "정치가 적극행정 발목" 연구도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감사원이 지난 20일 내놓은 월성 1호기 조기폐쇄 결정에 대한 감사 결과를 두고 정치권과 관가 곳곳에서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월성 1호기에 대한 불합리한 경제성 저평가와 이 과정에서 벌어진 산업통상자원부의 문재인 대통령 ‘눈치 보기’ 정황이 최대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감사원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부는 문 대통령의 한 마디만 듣고 객관적인 검토 과정은 생략한 채 모든 것을 청와대 보고용 결론에 맞췄고, 그 바람에 한국수력원자력의 잘못된 경제성 판단과 직원들의 관련 자료 삭제 등의 문제가 연쇄적으로 뒤따랐다. 감사원은 조기폐쇄 타당성 자체는 판단하지 않으며 균형을 도모했지만, 어쨌든 이번 감사 내용은 정치가 행정에 개입해 영혼 없는 공무원을 낳은 전형적인 사례로 남게 됐다.



“월성 1호기 경제성 낮췄다”면서 조기 폐쇄 타당성은 판단 안해

감사원은 20일 ‘월성 1호기 조기폐쇄 결정의 타당성 점검’ 감사 결과에 대한 자료에서 “2018년 6월11일 A회계법인이 한수원에 제출한 경제성 평가 용역 최종보고서에서 월성 1호기 즉시 가동 중단 대비 계속 가동의 경제성이 불합리하게 낮게 평가됐다”고 밝혔다. 한수원이 지난 2018년 5월께 회계법인에 월성 1호기를 계속 가동할 경우의 원전 판매단가를 직전 해(2017년)의 판매단가(1kwh당 60원76전)보다 9.3% 낮은 1kwh당 55원08전으로 변경하도록 해 경제성을 낮췄다는 지적이었다. 감사원은 또 월성 1호기 즉시 가동 중단 시 감소되는 인건비와 수선비 등도 그 규모가 과다하게 책정됐다고 명시했다.

감사원은 그럼에도 이번 감사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의 당위성을 가리는 게 아니었다며 정치적 해석과 거리를 뒀다. 보고서 이름은 ‘월성 1호기 조기폐쇄 결정의 타당성 점검’이지만 그 타당성 자체는 판단 영역의 밖에 둔 것이다.

감사원은 “감사원의 직무감찰규칙은 정부의 정책 결정, 정책 목적의 당부 등은 감사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규정한다”며 “이번 감사는 경제성 분야 위주로 이뤄졌으므로 감사 결과를 월성 1호기 즉시 가동중단 결정의 타당성에 대한 종합적 판단으로 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해당 결과는 지난해 9월 국회가 감사원에 감사를 요청한 이래 무려 1년1개월 만에 나온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권을 중심으로 최재형 감사원장을 향한 ‘사퇴’ ‘탄핵’ 요구까지 불거지는 등 온갖 정치적 논란과 압박이 끊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감사원이 여야 모두에 나름 명분을 쥘 수 있게끔 정무적으로 균형을 맞춘 결론을 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 /연합뉴스


“文, 언제 폐쇄하는 지 물었다” 보고받자... 白 “즉시 중단”

이날 감사원 보고서에서 특히 눈길을 끈 부분은 산업부가 경제성 평가와 무관하게 원전 가동을 즉시 중단한 경위와 그 과정이었다.

감사원이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부의 A과장은 지난 2018년 4월2일 청와대의 한 행정관으로부터 “청와대 B보좌관이 월성 1호기를 방문하고 돌아와 ‘외벽에 철근이 노출됐다’고 청와대 내부보고망에 게시하자 문 대통령이 월성1호기의 영구 가동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지 B보좌관에게 물었다”는 내용을 들었다. A과장은 이를 다음 날인 4월3일 백운규 당시 산업부 장관에게 보고하면서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영구 정지 운영 변경 허가까지 월성 1호기를 계속 가동하는 게 가능하며 한수원의 외부기관 경제성 평가가 아직 착수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보고했다.

이에 백 전 장관은 A과장을 질책하면서 “한수원 이사회의 조기폐쇄 결정과 함께 즉시 가동 중단하는 것으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A과장 보고 내용 중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의중을 다분히 우선한 결정이었다.

백 전 장관의 지시를 받은 A과장은 곧바로 월성 1호기를 조기폐쇄하고 즉각 가동 중단하는 쪽으로 보고서를 수정했다. 대통령비서실 보고에 앞서 현장 실무자가 작성한 기존 보고서를 대통령 뜻에 맞춰 전부 뜯어고친 것이다.

백 전 장관의 이날 판단은 이번 감사원 감사까지 나비효과가 돼 돌아왔다. A과장은 그해 4월4일 “백 전 장관 재검토 지시에 따라 가동은 어렵게 됐다”는 뜻을 한수원에 전했다. 한수원 관계자들은 “원안위 허가까지 가동하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산업부는 “이를 청와대에 보고할 예정”이라고 선을 그었다.

2018년 3월까지만 해도 여러 시나리오를 검토하던 한수원은 이후 월성 1호기 조기폐쇄 조치 외에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게 됐다. 한수원은 같은 해 4월10일 체결한 회계법인 경제성 평가용역 진행과정에서 폐쇄시기에 대한 다른 대안은 검토하지 않았고, 정재훈 한수원 사장도 별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원전 판매단가를 불합리하게 변경하면서 “입력변수를 수정해야 한다”는 부사장의 주장은 묵살됐다.

성윤모 현 산업부 장관. /연합뉴스


산업부, 감사원 감사 예고되자 ‘자료 삭제’ 추태까지

의사결정 자체가 사실상 청와대로부터 하향식으로 불합리하게 진행되다 보니 감사원 감사 대응 때 산업부 공무원들이 보인 모습도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무슨 대단한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자료를 통째로 지우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촌극까지 연출했다.

지난해 산업부 C국장은 국회 요청으로 감사원 감사가 예고되자 관계자들과 대응 방안을 논한 뒤 그해 11월 부하직원 D과장에게 PC는 물론 휴대전화, 이메일에 저장된 월성 1호기 관련 자료까지 모두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D과장은 다음 달인 12월 C국장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했다. 자료가 인멸된 상태에서 디지털 포렌식까지 진행한 감사원은 444개 문서가 있음을 확인했으나 120개 문서는 결국 복구하지 못했다.



지난 15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산업부 공무원이 관계자료를 거의 삭제해 복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며 “사실을 감추거나 허위진술하면 추궁하는 게 수없이 반복됐다”던 최재형 감사원장의 한탄이 무슨 의미였는지 그 베일을 벗은 것이다. 당시 최 원장은 “저항이 이렇게 심한 감사는 재임하는 동안 처음”이라며 “감사 관련 수집자료, 문답서, 포렌식을 이용해 되살린 문서, 자체 문서까지 모두 공개할 용의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감사원은 그럼에도 감사 대상자들에 대한 직접 고발은 자제했다. 감사원은 백 전 장관의 행동은 국가공무원법 제56조를 위반한 비위 행위로 보고 엄중한 인사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나, 그가 이미 퇴직한 후라 산업부에 인사자료를 통보하는 수준으로 마무리했다. 산업부 장관에게는 정재훈 한수원 사장에게 “엄중하게 주의를 주라”고 요구했고, 산업부 C국장과 D과장에게는 징계를 요청했다. 문책 대상자들과 관련한 자료는 수사기관에도 보내기로 했다. 조기폐쇄를 의결한 한수원 이사들에 대해선 본인이나 제3자가 이익을 취득하지 않았고 한수원에 재산상 손해를 가할 의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배임 행위를 저지른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지난 22일 서울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부 종합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송갑석(왼쪽) 의원이 월성1호기 감사원 감사 결과에 대한 국민의힘 김정재(오른쪽) 의원의 질의 내용에 항의하며 다가가자 이철규 야당 간사가 만류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디서 삿대질” “한 대 치겠다”... 여야는 난장판 싸움

감사원의 월성 1호기 감사 결과는 곧바로 여야 간 공방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지난 22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산업부 대상 국정감사에서는 고성과 반말이 오가는 험악한 풍경까지 펼쳐졌다.

국미의힘 김정재 의원이 산업부의 감사 자료 삭제를 문제시하면서 “산업부 장관은 대통령 말 한마디에 엎드렸고 한수원 사장은 직원들을 내몰았다”고 말하자 송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산업부 장·차관이 무슨 대단한 범죄자인 줄 알겠다”고 맞받아쳤다. 이에 김 의원은 “동료 의원 질의에 딴지를 거는 게 기본 예의냐”고 반박했고 송 의원은 “어디서 끼어들고 있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의원과 송 의원은 “어디서 삿대질이냐” “질문에도 금도가 있다”는 등 말다툼을 이어갔고 이학영 위원장은 이에 서둘러 정회를 선포했다. 송 의원은 정회 뒤에도 김 의원 자리로 다가가 “내 발언에 왜 끼어드느냐”고 항의했고 김 의원은 “어디서 삿대질이야, 한 대 치겠습니다”라며 기 싸움을 이어갔다.

성윤모 장관은 산업부 공무원들의 자료 삭제에 대해 유감을 표하면서도 “산업부가 조직적으로 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또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결과도 조작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23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논쟁은 이어졌다. 이용빈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월성1호기 감사에 대해서도 국민은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꼽는다”고 주장했고, 국민의힘 조명희 의원은 “탈핵주의자와 비전문가들이 원안위 주요 보직을 꿰차고 원자력 정책을 정치적으로 결정한다”고 반박했다.

정재훈 한수원 사장은 경제성 평가에 조작이 있었다는 의견에 대해 “그렇게 판단하는 것엔 무리가 있다”고 반대했다.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연합뉴스


정치 주도 행정에 영혼 사라지는 공무원들

결과적으로 이번 월성 1호기 조기폐쇄 감사는 ‘정치의 행정 개입’ ‘행정의 정치화’가 공직자들의 소신을 얼마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제대로 확인해 준 대표 사례로 남게 됐다. 이와 연관해서는 지난 2017년 8월 “공직자는 국민과 함께 깨어 있는 존재가 돼야지, 그저 정권의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 돼선 안 된다”고 한 문 대통령의 첫 정부 부처 업무보고 발언도 덩달아 회자됐다.

최근 감사원 소속 감사연구원의 의뢰로 한국사회과학협의회가 최근 제출한 ‘적극행정을 위한 법체계와 감사원의 역할에 관한 연구’ 용역보고서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보고서는 “정치가 (행정을) 주도하는 현실에서 아무리 적극행정을 강조해도 ‘다음 정부에서 어떻게 뒤바뀌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신의 상태에서는 적극행정을 하기 쉽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어 “산업화 시대의 공무원은 발전행정의 선도자로서 개인이 추구하려는 목적과 조직의 목적 사이에 교집합이 많아 적극행정을 추구할 동기가 많았다”며 “그러나 민주화 시대엔 다양한 이해관계자 간의 첨예한 갈등에 대한 조정·합의 등이 중시돼 국정운영에서 입법부 우위나 정치 주도 현상이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또 “정치인들은 과거보다 더욱 치열해진 선거경쟁 과정에서 남발한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행정관료들에게 보다 적극적인 업무수행을 기대한다”며 “행정관료는 과거보다 훨씬 엄격해진 법치주의 원리에 부응하면서 정치적 상관의 적극행정 기대에도 부응해야 한다는 다소 상충적인 업무환경에 처해 있다”고 설명했다.

입법부나 선출직 출신들이 이념적으로 추구하는 정치와 실제 행정 시스템을 분리하고 그 속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문 대통령이 지적한 ‘영혼 없는 공무원’이 현 정부에서는 얼마나 사라졌는지, 지금과 같은 체제 안에서 다음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사라질 가능성은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곱씹어볼 시점이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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