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5년 11월24일 서프랑크왕국 파리가 공포에 젖었다. 바이킹의 습격 탓이다. 서프랑크는 프랑크왕국을 삼분한 베르됭 조약(843년)으로 태동한 직후부터 유달리 대규모 공격을 자주 받았다. 845년에는 120척에 분승한 5,000명이 파리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금 2,570㎏을 받고서야 물러난 적도 있다. 860년에도 세 차례 침공해 막대한 공물을 챙겨갔다.
바이킹의 속셈은 내륙 도시 약탈. 센강의 작은 도시였던 파리를 수로로 거쳐 비옥한 내륙 곳곳을 치겠다는 의도였다. 약탈 목표지역이 많고 넓었기에 바이킹은 사상 최대 규모의 약탈 선단을 꾸렸다. 전사 4만여명이 분승한 700척 선단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센강 10㎞ 구간의 강물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방어 병력의 숫자는 불과 200여명에 불과했으나 센강을 가로막는 다리 두 곳만 지키면 침공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바이킹은 석재와 목재 다리 두 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바이킹이 파리 인근에 상륙해 소규모 약탈을 하는 동안 방어군도 늘어났다. 짧게 끝날 것 같던 전투는 장기전으로 바뀌었다. 소강상태는 이상기후로 깨졌다. 느닷없는 2월의 폭우로 목재 다리 요새가 함락되기 직전, 협상이 맺어졌다. 공납금 금 257㎏ 납부와 부르고뉴에 대한 약탈권 인정. 파리 남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는 마침 반란을 일으켰던 상태. 서프랑크는 바이킹의 한시적 약탈을 묵인해 부르고뉴의 반란을 잠재웠다.
바이킹은 결국 886년 가을, 풍요로운 부르고뉴에서 뺏은 약탈품과 공납금까지 싸들고 유유히 물러났다. 문제는 공납과 약탈 요구가 반복됐다는 점. 견디다 못한 서프랑크왕국은 911년 한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영구해결책’을 내놓았다. 고위작위와 땅을 하사하는 대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다른 바이킹의 침입을 막아달라는 국왕의 제안을 노르만 침입자들은 받아들였다. 노르만공국이 성립하고야 멈춘 바이킹의 프랑크 침공은 서양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프랑스와 영국이 116년(1337~1453년) 동안 싸운 백년전쟁의 단초도 바이킹 침공이다. 파리 방어전을 주도했던 오도 백작은 카롤링거 가문이 아닌 최초의 서프랑크 국왕 자리에 올랐다. 노령에도 방패와 도끼를 들고 방어전에 참전, 병사한 파리 대주교는 전투에 직접 참전한 최초의 기독교 성직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서양 군종제도가 여기서 시작된 셈이다. 뷔페도 바이킹이 퍼트린 음식문화다. 약탈에 성공한 뒤 모든 음식을 큰 판자에 쌓아두고 함께 먹은 바이킹의 풍속이 시조라고.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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