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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日 왕정복고 쿠데타

고비마다 외세 침략 막으려 단결





1867년 12월 9일(일본력) 아침, 교토 왕궁. 사쓰마 등 5개 번(藩)의 병사들이 왕궁 출입문 9개를 모두 막았다. 쇼군에게 충성하는 공경(중신)과 다이묘(지방 영주)의 출입을 막기 위해서다. 쇼균 요시노부 등의 출입을 봉쇄한 존왕파(尊王派)는 ‘왕정복고 대호령’을 읽었다. 막부와 섭정·관백제도를 폐지하고 총재와 의정·참여 등 3개 직책을 신설하는 게 주요 내용. 한마디로 쇼군의 실질 권력을 빼앗아 왕에게 되돌려준다는 것이다.

왕정복고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은 서부의 웅번(雄藩)인 사쓰마와 조슈. 이미 두 달 전에 쇼군이 왕에게 전권을 내준다는 대정봉환(大政奉環)이 지지부진한 데 불만을 품었다. 15대 쇼군 요시노부는 총리 직책을 원한 반면 사쓰마와 조슈의 동맹체인 삿슈는 완전한 권력 이양을 주장하다 막히자 일을 벌였다. 흔히들 일본의 왕정복고와 유신이 큰 인명 피해 없이 성사됐다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왕정복고 선언으로 일본은 토막(討幕) 존왕파와 막부 지지 세력 간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근대식 해군을 보유하고 있던 쇼군은 달력이 바뀌자마자 포문을 열었다. 막부는 군함을 동원해 사쓰마번의 기선을 포격하고 교토와 오사카 사이의 도바(島羽)와 후시미(伏見)에도 병력을 보냈다. 호기롭게 쿠데타를 일으켰던 존왕파들은 내심 떨었다. 막부가 동원한 병력이 존왕파보다 3배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패할 경우 15세 국왕 메이지를 여인으로 변장시켜 탈출한 뒤 재기를 도모한다는 비상계획까지 세웠다. 막상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존왕파의 완승.



막부 충성파는 홋카이도로 피신해 에조공화국까지 세우며 저항했으나 싸움은 1869년 여름 사실상 끝났다. 존왕파의 승리 비결은 두 가지. 첫째, 명분에서 앞섰다. 전투마다 샷슈군은 국왕의 금 깃발을 내걸었다. ‘천황의 금기(金旗)’에 맞서 싸우면 자손 대대 역적으로 몰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막부군의 사기가 꺾였다. 둘째, 조직에서도 차이가 났다. 막부군 사무라이들의 칼은 근대화가 진행된 샷슈 측 농민 출신 소총수들의 탄알에 부러졌다.

왕정복고 이후 일본은 유신의 기치 아래 빠르게 커졌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로 물리쳐 열강의 일원으로도 인정받았다. 동갑내기 군주, 고종과 메이지의 조선과 일본은 달라도 한참 다른 길을 걸었다. 두 나라는 외세에 대한 인식부터 달랐다. 일본은 고비 때마다 ‘우리가 분열하면 청나라처럼 외침을 받게 된다’며 내부 싸움을 멈췄다. 반면 조선은 당쟁에 몰두한 채 외국에 의존하려다 결국은 남에게 먹히고 말았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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