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는 기분 좋은 상상을 그려내는 멋진 직업입니다.”
한국형 좀비물인 K좀비의 정점을 보여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은 조선 시대와 좀비라는 대담한 상상력을 담은 독특한 세계관으로 전 세계적인 히트를 쳤다. 현대적 소재인 좀비가 조선을 휩쓴다는 설정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한 현재와 맞물리며 세계적인 관심을 모은 것이다.
그야말로 창의적인 판타지가 가능했던 것은 ‘킹덤’의 원작이 웹툰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시그널’과 ‘싸인’으로 유명한 김은희 작가의 탄탄한 스토리라인에 국내 최고 작화 실력을 자랑하는 양경일 만화가가 캐릭터에 힘을 불어넣은 ‘버닝헬: 신의 나라’가 그 원작이다. 특히 ‘신의 나라’는 양 작가 특유의 작화력이 빛을 발한 작품이다.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수묵화 같은 양 작가의 터치가 동양적 판타지의 몽환적 분위기를 극대화했다는 평이다.
‘드래곤볼’과 ‘슬램덩크’ 등 일본 만화가 휩쓸던 지난 1993년 주간 만화 잡지인 ‘소년 챔프’에 ‘소마신화전기’로 데뷔한 그는 이후 ‘아일랜드’ ‘좀비헌터’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8년 일본에 진출해 발표한 작품인 ‘신암행어사’가 현지에서 극장판으로 제작될 정도로 평가를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일본 대표 만화가이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슬램덩크’와 ‘배가본드’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대단한 필력이다.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당신의 무의미한 선입견을 사라질 것”이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27년 가까이 한국형 판타지의 대가로 불리며 어느덧 만화계의 ‘어른’이 됐지만 최근 신작 ‘칼집의 아이’로 다시 전성기를 맞은 양 작가. 라이프점프가 그를 만나러 인천시 미추홀구 용현동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실 문을 열자 올해 50세의 나이와 오랜 경력에 비해 상당히 앳된 얼굴의 양 작가와 그를 따라 나온 고양이가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일반 아파트에 마련된 그의 작업실에는 고양이는 물론 강아지 3마리도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고양이가 귀엽다.
“집 근처에서 계속 따라오던 고양이다. 마침 고양이를 찾는다는 전단을 보고 집에 데려와 연락을 해봤는데 이미 찾았다고... 이미 집에 데려왔는데 다시 밖으로 보낼 수도 없고 당시 부상도 심했던 상태라 병원 치료를 해주며 보호하다 보니깐 결국 한가족이 됐다.”
-선 굵고 대담한 액션 신으로 유명한 당신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 듯 하다. (하하) 작업실에 컴퓨터하고 태블릿이 특히 눈에 띈다.
“웹툰을 실질적으로 시작한 지 5년 정도 된 것 같다. 일본에서의 작업이 종료되는 시점에 일본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이전에는 지하철에서 만화책을 많이 보던 일본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는 것을 보고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만화 산업이 웹툰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읽어낸 것처럼 실제로 한국 웹툰의 시장 규모는 2015년 4,200억원, 2018년 8,800억원까지 성장했고 올해는 약 1조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한국의 웹툰은 웹이 아닌 모바일에 최적화된 세로 스크롤 방식으로 젊은 세대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종이에 그리던 것에서 웹으로 이동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웹툰은 흑백인 출판 만화와 달리 기본적으로 컬러이고, 책을 넘기는 출판 만화와 달리 스크롤을 통해 만화를 보기 때문에 연출 방식도 다르다. 작품이 완성되면 원고를 DHL로 보내던 시대에 머물지 않기 위해 웹툰을 공부했지.”
-현재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칼집의 아이’의 인기가 높다. 오기 전에 조사해보니까 누적조회수가 5,500만건 정도던데.
“이 작품은 이미 중국에 진출했고 앞으로 태국과 대만 등 동남아시아는 물론 북미 지역에도 진출할 예정이다. ‘칼집의 아이’는 애당초 한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에도 웹툰 작가들이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기획됐다.”
-인기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누가 봐도 재밌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고려하면서 작업을 한다. 동양 판타지이지만 유럽에서도 함께 공감하고 즐길 수 있도록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세계관을 담으려 했다. 해외에서는 동양의 판타지를 신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 실제 ‘칼집의 아이’ 중후반에 유럽에서 넘어온 세력이 등장하는 등 단순 무협 세계관이 아닌 글로벌에서 통하는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다.”
-판타지 만화의 대가인데 당신 작품 속에 녹아 있는 판타지적 세계관은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하다.
“무한한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지. 창작 영역에 가까운 판타지 장르에서 필수인 상상력은 어렸을 때 봤던 영화나 책이 많이 도움이 된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낙서를 좋아했다. 유년 시절에는 인기 있던 유명 만화가나 ‘600만불 사나이’ 같은 해외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를 그리면서 그림 실력을 키웠고.
고등학교 때인가? 영화 ‘천녀유혼’에 나오는 당대 스타였던 왕조현을 그려 같은 반 친구들에게 팔았다.“
-데뷔했을 때 나이가 스물 넷?
“군대 제대하고 문하생 생활을 시작했다. 한 달에 3만원씩 받으면서. (하하) 그러다가 스물 네 살에 내 이름 걸고 작가로 데뷔했다.”
-또 다른 작품 ‘아일랜드’는 드라마화가 결정됐는데.
“당시 ‘아일랜드’를 작업할 때 좋아했던 배우인 소지섭과 한예슬을 모델 삼아 캐릭터 이미지를 그려 나갔다. 무협 판타지 장르의 작품을 할 때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 주윤발과 임청하가 내 작품 캐릭터로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그리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영화로도 만들고 싶은 게 꿈이다.”
-K웹툰은 더 성장할까.
“내가 출판 만화 시절부터 지금까지 작가생활을 해오고 있다. 나름 전문가 시각으로 봤을 때 한국 만화 시장은 앞으로 더 발전할 거다. 일단 한국에는 재능이 뛰어난 창작가들이 많다. 그 재능을 표출할 공간인 웹툰이라는 플랫폼이 이를 극대화 시켜 줄 거다.
나만 해도 유행하는 장르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장르에 매진했다. 그 장르를 사랑해주는 독자분들 덕분에 오랜 기간 작가로 생활할 수 있었고. 후배들도 자신이 제일 잘하는 장르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를 묻지 않을 수 없는데 구글이 내년 1월20일부터 수수료 정책을 바꾸기로 하면서 웹툰 업계의 반발이 심하다.
“(고민하며) 무서운 일이다. 뉴스 보고 깜짝 놀랐다. 이쪽에서 오래 일한 나도 무서운데 신인들은 어떻겠는가.
이런 거다. 출판 만화 시절에는 출판사가 여러 개 있었다. 한 출판사가 인세 올리거나 조건이 달라지면 다른 출판사를 선택하면 됐다. 그런데 웹툰 시대에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옵션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결국 구글이 새로운 결제 및 수수료 정책을 적용하면 작가들의 수익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새로운 창작활동도 줄어들 거다. 국내 재능 있는 신인작가들의 등용문인 웹툰에 인앱결제 족쇄가 채워지면 젊은 작가들이 설 땅을 잃게 되고 결국 K웹툰의 인기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겠지. 구글 역시 이런 작가들의 노력에 함께 커왔다는 점과 산업을 죽이면 모두가 힘들어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노현섭 기자 hit812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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