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물류 전문가가 아닙니다. 골프웨어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고요. 하지만 경영이라는 것은 결국 구성원들과의 대화로 돌파구를 만들고 원가 관리하고 영업·매출에 기여할 부분을 발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근 서울 강남의 사무실에서 만난 하현(51) ㈜국보 대표이사는 소탈한 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물류나 골프웨어 전문가는 아니지만 사실 하 대표는 ‘전문가’ 타이틀과 가장 친숙한 최고경영자(CEO) 중 한 명이다. 국내 1호 전자상거래관리사(KPC)이자 사이버포렌식전문가(CCFP(ISC)2)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과거 e비즈니스 도메인 등록의 ‘A to Z’를 담은 책을 내기도 했던 하 대표는 컴퓨터 관련 잡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하는가 하면 도메인 전문가로 일간지 1면을 장식한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옛날에 PC 잡지들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잡지에 당시 제 월수입이 1억 원 가까이 된다고 나간 거예요. 아마 연 수입의 오타였던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유명세를 치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자상거래에 정통하면 한 달에 1억 원씩 벌 수 있다는 얘기에 일부 상고 3학년생들 사이에서는 때아닌 전자상거래관리사 자격증 붐이 일었다고 한다.
대학에서 생물공학을 전공한 하 대표는 지난 1995년 졸업 후 ㈜대우에서 전산 업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직장 생활 중 전자상거래가 유망할 것이라는 얘기를 귀담아듣고 한국생산성본부에서 전자상거래관리사 자격증반을 만들자마자 등록해 수료했다. 하 대표의 자격증 등록번호는 ‘0001번’이다. 자격증 획득에만 그치지 않고 그는 1회 수료생들과 뜻을 모아 한국전자상거래관리사협회를 만들고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잘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네트워크 보안 업체를 차리고 상장사와의 합병을 통해 성공 가도를 달린 것도 이맘때였다.
2004년부터는 사이버포렌식전문가협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다. 사이버포렌식의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에 하 대표는 정보보호대학원에 들어가 협회를 만들고 자격증 제도를 개설했다. “지금은 뉴스를 통해 많이 알려졌잖아요. 스마트폰이 개인 블랙박스라는 사실도 다들 잘 알고요. 하지만 그때 우리나라는 사이버포렌식 분야의 거의 불모지였어요. 협회에서 발급하는 자격증이 요즘 변호사 업계나 회계법인, 군이나 검경 등에서 두루 우대받고 있으니 한편으로 뿌듯하죠.”
카멜레온 같은 변신과 거침없는 실행의 원동력을 물으니 하 대표는 성격 얘기를 했다. “제가 일단 워커홀릭이에요. 성격이 괄괄해서인지 정중동(靜中動)이 되지 않는 스타일이라 우선 움직이고 보죠. 그러다 안 되면 바로잡아가거나 제 능력이 모자라다 싶으면 두 손 들고 나오는 거고요. 안 되는데도 붙잡고 있으면 조직이 망가질 테니까요.”
하 대표는 인수합병(M&A) 전문 기업 등을 거쳐 2019년 7월 국보 대표이사, 이사회 의장에 취임해 새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부산이 본거지인 국보는 1953년 국보운수로 시작해 연 매출 700억 원 규모의 종합 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 대표는 “6·25전쟁 막바지에 생겨나 67년째를 맞았고 코스피 상장은 31년 된 회사”라며 “제 역할은 100년 기업으로 가는 동력을 만드는 것이다. 요즘은 코로나 상황 때문에 못하지만 ‘국보’ 하면 ‘100년’을 외치는 게 저희 건배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매출 700억 원 정도를 올리는데 제조업으로 치면 1조 원 기업과 맞먹는다고 볼 수 있다. 광복 이후 정식으로 주식회사를 만들어 100년을 유지한 회사라는 것은 정말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회사가 어려울 때 구원투수로 투입된 하 대표는 전문 분야인 정보기술(IT)을 앞세워 체질 개선을 꾀했다.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을 구축해 각 업무의 연결고리에 기름칠을 했고 선주·화주 간 상생과 사업 효율성 혁신을 목표로 스마트모빌리티 업체인 벅시 인수를 밀어붙였다. “공항 픽업 서비스에서 출발한 벅시의 원천 기술에 주목했어요. 그러고는 그쪽이 다져놓은 공유 경제 플랫폼을 화물에 접목한 거죠. 배차부터 화물 적재량까지 전부 모바일로 실시간 확인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화주는 자기 물건이 지금 어디쯤 있나, 언제 받을 수 있나 한 번에 확인할 수 있고요.” 유상증자와 전환사채(CB) 발행을 추진하면서 조직 슬림화를 병행한 결과 160억 원 수준이던 회사 순자본이 1년 반 만에 480억 원까지 뛰었다.
국보의 보그인터내셔날 인수로 골프웨어 브랜드 보그너의 대표이사직도 맡은 하 대표는 골프와 스마트모빌리티 간 협업을 주도했다. 공유 차량을 이용한 골프장 단체 왕복 서비스인 ‘벅시골프’다. 선수의 친필 사인이 담긴 보그너 모자와 벅시 로고를 새긴 골프볼 증정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 대표는 “보그너는 라이선스 비즈니스지만 올해로 20년째 함께할 정도로 독일 본사와 관계가 끈끈하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품의 90%를 국내 공장에서 자체 생산한다는 자부심도 있다”며 “국보는 보그너 지분을 94%나 가진 만큼 자회사를 넘어 한 몸처럼 생각하고 있다. 알파·베타 테스트를 다 마치고 조만간 대대적으로 오픈할 온라인쇼핑몰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IT 전문가답게 그는 “애플리케이션의 성패는 결국 접근성에 달려 있다. 물건을 사기까지 다섯 번 클릭하던 것을 세 번의 클릭으로 간편하게 구매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입어보지 않아도 입어본 것만큼 제품을 잘 알 수 있게 시각화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또 고객관계관리(CRM)를 통해 고객이 선호하는 것들을 가장 먼저 눈에 띄게 하는 등 유명 모델 섭외에 들일 돈을 아껴 앱 완성도에 재투자하고 선수 후원도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주말이면 늘 등산을 하는데 등산복을 갖춰 입고 오는 사람이 점점 줄어요. 골프웨어 차림인 사람도 많고요. 골프 칠 때만 입는 옷에서 벗어나 일할 때도, 등산할 때도 입는 골프웨어로 브랜드 방향을 확장해나가겠습니다.”
지난해부터는 마스크 사업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국보는 지난해 7월 마스크 제조 업체와 손잡고 해외시장 공략에 역량을 집중했다. 최근에는 국보의 KF94 마스크와 덴탈 마스크가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가장 높은 평가 등급인 ‘ASTM 레벨 3’를 국내 최초로 동시에 획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 대표는 “많은 분이 마스크 사업의 후발 주자라고 알고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해왔다. 수십 년간 쌓아온 화물 운송 노하우를 활용할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찾은 셈”이라며 “코로나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마스크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도 바뀔 것이다. 사람들이 제대로 된 마스크를 쓰느냐 아니냐에 따라 코로나 상황이 갈릴 수도 있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하 대표는 일만큼이나 취미 생활도 ‘화끈’하다. 자전거를 타면 한 번에 60~80㎞는 달려야 직성이 풀리고 책도 한 번 꽂히면 같은 소재의 책을 다 찾아 읽곤 한다는 하 대표는 ‘은퇴하면 책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때는 IT 분야가 아니라 역사서나 리더십을 주제로 한 평전, M&A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단다. “위대한 기업인들의 평전을 보면 실패도 아름답게 그려지잖아요. 이겨내고 살아남았기에 실수도, 실패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살아남은 자가 역사를 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금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He is… △1970년 경남 진주 △1995년 고려대 생물공학 학사 △1995년 ㈜대우 △1999년 국내 1호 전자상거래관리사(KPC) △2001년 이카디아 대표이사, 한국사이버감시단 사무국장 △2004년 사이버포렌식전문가협회 수석부회장,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정보보호·사이버포렌식 전공 △2019년 보그인터내셔날 이사회 의장, 벅시 이사회 의장, ㈜국보 대표이사, 이사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