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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현대미술의 성찬…문득 나를 돌아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품 특별전]

정체성 탐구한 펜들턴 '나의 구성요소들'

삶의 긴장감 그린 게니 '빈민가'

국내외 40여 작가의 작품 선봬

동시대 미술 생생한 흐름 보여줘

아담 펜들턴 '나의 구성요소들' /사진제공=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검은 얼굴과 검은 가면 사이로 검은 얼룩을 뒤집어 쓴 검은 글씨들이 엇갈리게 놓였다. 가면의 역할은 얼굴을 가리기 위한 것이지만, 때로는 가면 주인의 정체성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젊은 현대미술가 아담 펜들턴(37)은 회화·조각·글·영화·퍼포먼스 등을 통해 개념적인 작업을 하는데, 다양한 매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는 흑인으로서의 정체성(blackness)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들여다 본 정체성 탐구와 추상, 아방가르드에 관한 ‘블랙 다다(Black Dada)’ 작업은 펜들턴의 이름을 미술계에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소장품 특별전 ‘APMA, 챕터3’이 한창인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090430)미술관 전시장에서 가장 큰 벽면을 독차지한 펜들턴의 작품 제목은 ‘나의 구성요소들’. 역사적 사진, 오래 간직해 온 책의 한 페이지, 아프리카 조각과 마스크 이미지 위에 작가가 직접 글을 쓰거나 선을 긋고 그림을 그렸다. 제각각인 여러 요소들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듯, 검은 테두리의 액자 속에 담긴 총 46점의 작품이 하나의 설치 작업을 이룬다. 흑인 소수자로서 발버둥치듯 세상과 싸웠던 작가의 삶이 5.7m 높이의 벽을 극적으로 채운다. 배우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직후 인종 문제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무지개처럼 모든 색을 합쳐 더 예쁘게 살아야한다”고 답했는데, 펜들턴은 그 아름다운 색이 모두 합쳐 탄생할 법한 깊은 검은색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유심히 들여다볼수록 시선은 작품이 아닌 관객 자신에게로,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로 쏠린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품 특별전 'APMA-챕터3'의 전시 전경. /사진제공=아모레퍼시픽미술관


지난 2018년 개관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세 번째 소장품 특별전인 이번 전시는 고전이 된 거장의 작품이 아닌 동시대 미술의 생생한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이 미술관은 창업주 서성환(1924~2003)회장이 고미술을 수집해 1979년 문 연 태평양박물관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아들 서경배 회장에 이르러 기업이 성장하듯 컬렉션도 동서양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방향으로 확장됐다. 서 회장은 삼성의 이건희 회장 부부, 파라다이스 전필립 회장 부부와 더불어 ‘세계 200대 컬렉터’에 이름을 올리는 국내 몇 안 되는 미술품 수집가 중 한 사람이다. 미술관의 모기업이 화장품 회사라 고운 그림 일색일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외모 못지않은 내면을 강조하듯 작품들은 예술가들의 깊은 고뇌를 끄집어내 공유하고 토론하게 만든다.

아드리안 게니 '빈민가' /사진제공=아모레퍼시픽미술관


브라질 태생 아드리안 게니의 작품 ‘빈민가’는 한때 작가가 살았던 가난한 동네가 배경이다.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풍경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양철 패널이 솟아있는 도심 속에 정글의 동물들을 뒤엉키게 그려 삶의 긴장감을 드러낸다. 베트남 난민으로 4살 때 덴마크로 건너간 작가 얀보의 금빛 작품 ‘숫자7’은 좀 더 복잡한 사연을 담고 있다. 작가는 쓰고 버려진 택배 상자를 태국의 공예가에게 보내 숫자 7만 남겨두고 금박을 입히게 했다. 자본주의의 상징 같은 택배 상자와 불교 미술을 상징하는 금박의 결합은 성속(聖俗)의 기묘한 조화를 보여주며 상업화 된 사회의 가치를 되묻는다.

얀 보 '숫자7'




그레고르 힐데브란트 '모자이크-넬리'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추상적인 정갈함 속에서도 현대미술은 질문을 던진다. 그레고르 힐데브란트의 ‘모자이크-넬리’는 소피 마르소가 등장하는 동명의 영화 장면을 보여준다. 극 중 주인공은 남편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강물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다. 작가는 이 장면을 카세트테이프 케이스 옆면 크기로 잘라 붙였다. 총 6,496개의 테이프가 작품을 이루는데, 그 안에 담긴 노래도 ‘넬리’의 사연 만큼이나 구슬프다고 한다.

APMA의 소장품 특별전에 선보인 이불과 최우람의 작품 전시 전경. /사진제공=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젊은, 동양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파격적인 작업으로 펼쳐보였던 작가 이불의 2000년작 ‘크러쉬’는 말 그대로 슬프도록 아름답다. 자기 탐구에 기반한 ‘사이보그’ 연작으로 완벽성 추구의 욕망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작가가 크리스탈과 유리 구슬로 마치 갑옷 입은 기사 같은 형상을 만들어 공중에 매달았다. 그림자까지 반짝일 정도로 시각적 아름다움이 탁월하지만, 실상 속이 빈 듯 처연하기에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이건용의 ‘신체드로잉 76-1-B’는 캔버스 뒤에 선 작가가 자신의 팔이 닿는 범위 내에서, 붓질을 반복해 완성한 작품이다. 이 또한 자신에 대한 성찰, 한계와의 싸움이 얻은 결과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사전 예약제로 진행 중인 전시인데, 주말 관람은 서두르지 않으면 예약이 힘들 정도로 인기다. 팬데믹으로 해외 여행이 막혀 해외 미술 관람에 목마른 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전시다. 7개 전시실에서 40여 작가의 50여점 작품을 선보였다. 마지막 전시장은 지난 1월 타계한 김창열 화백의 특별전으로 구성됐다.

미술관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소장품 전시에 대해 우혜수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부관장은 “컨템포러리(동시대미술)의 수집은 견고한 자기 확신이 필요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라며 “열려있는 가능성까지 포함해 컬렉션을 이뤘고, 작품들이 스스로 모양을 잡아가고 관람객의 상상력까지 더해져 미술관의 성격을 함께 만들어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8월22일까지.

APMA 소장품 특별전 '챕터3' 전시 전경. /사진제공=아모레퍼시픽미술관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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