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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자본시장에 이용 당한 '붉은 액체'의 두 얼굴

■ 5리터의 피

로즈 조지 지음, 한빛비즈 펴냄

생명의 원천으로 소중히 여기지만

의학 넘어 경제·사회 문제와 얽혀

지구촌 곳곳서 버젓이 '매혈' 성행

세계 13번째 많은 교역 상품으로

에이즈 등 연계 사회적 차별도 여전





피는 생명의 원천이다. 몸 속 혈액은 신체 세포에 산소를 공급하며 생명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가 모자라면 사람은 살 수가 없다. 출혈량이 1.5ℓ를 넘는 과다 출혈이 발생하면 생명이 위험해 진다. 반면 신선한 혈액을 수혈 받기만 해도 에너지가 회복되는 효과가 있다. 세계적인 사이클 선수였던 랜스 암스트롱은 자기의 피를 빼내 자가수혈용으로 냉장고에 쌓아 놓곤 했다. 신선한 피를 일정량 수혈하면 적혈구가 늘어나 근육에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혈액 도핑’이 발각되면서 암스트롱은 그간 받은 모든 상을 박탈 당하고 선수 자격이 영구 정지됐다. 피는 세계반도핑기구가 지정한 금지 약물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 로즈 조지의 신간 ‘5리터의 피’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혈액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조망한 책이다. 책 제목은 성인이 체내에 보유하는 혈액량을 뜻한다. 저자는 촘촘한 취재를 통해 피를 과학과 의학 뿐 아니라 역사·정치·사회·경제 등 모든 관점에서 파헤치며 우리가 몰랐던 이면과 진실을 전한다.

책이 비중 있게 전하는 이야기는 주로 피를 매개로 드러나는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빈부 격차다. 가령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매혈’ 문제가 있다. 각국은 돈을 받고 피를 파는 행위를 법적으로 금지하지만, 세계보건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71개국에서 수혈에 쓸 혈액의 절반 이상이 가족 대리 헌혈(환자가 수혈할 피를 일가친척에게 헌혈하도록 권하는 것)이나 매혈로 충당된다. 인도에서는 1996년 대법원 판결로 매혈과 불가촉천민의 헌혈이 금지됐지만,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 모두 성행하고 있다. 지난 2017년 모드 아리프라는 남성은 매혈자 중개인에게 500루피(약 8,720원)를, 매혈자에게는 1,000루피를 주고 피를 뽑아서 가정용 냉장고에 저장한 뒤 혈액은행과 병원에 4,000루피를 받고 판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세계헌혈자의 날인 지난 달 14일 강서구 대한적십자사 중앙혈액원 핼액보관소에서 한 직원이 각 병원으로 발송될 혈액을 분류하고 있다. /이호재 기자




월경, 에이즈 등 피와 관계있는 이슈에서는 여성이 받는 차별적 대우가 눈에 들어온다. 미국·북유럽 등 선진국에서 에이즈는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 수준으로 인식되지만 아프리카·동유럽에서는 여전히 치명적 질병이다. 그리고 에이즈의 원인인 HIV바이러스 감염자의 절반 이상은 여성이다. 저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해안도시 케이프타운의 흑인 거주지에서 만난 청소년들을 통해 젊고 어린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해 에이즈에 감염되는 현실을 전한다. 그런가 하면 네팔에서는 생리 중인 여성이 집 안에 발을 들일 수 없어 헛간에서 잠을 자고, 다른 이와 접촉도 하지 못하는 ‘차우파디’라는 악습이 있다. 생리를 터부시하는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는 생리를 한다는 이유로 여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일도 다반사다. 생리대 가격은 전 세계적으로 비싼데, 아프리카 케냐에서는 생리대 살 돈을 구하기 위해 이른바 ‘생리대 섹스’라는 성매매가 생길 정도다. 그럼에도 여전히 상당수 국가들은 생리대를 사치품으로 간주하고 세금을 매겨 가격의 장벽을 만들고 있다.

혈액이 거래되는 과정의 어두운 면도 들춰낸다. 인간과 동물의 피는 전 세계에서 13번째로 많이 거래되는 교역 상품이다. 혈액제제는 대부분 혈장에서 추출하는데, 원산지가 세계 최대의 혈장 수출국인 미국이다. 미국이 혈액 수출로 벌어 들이는 수익은 연간 약 200억 달러에 달한다. 문제는 이처럼 미국이 혈액을 상업적 거래물로 취급하면서 HIV나 C형간염 바이러스 등에 오염된 혈장까지 수출했다는 점이다. 혈우병 환자들은 치료를 위해 수혈이 필요한데, 오염된 혈장을 수혈하는 바람에 HIV에 감염돼 에이즈라는 이중고를 떠안기도 한다고 저자는 전한다.

한 여성이 지난 8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한 노인으로부터 코로나19 항체 테스트에 사용하기 위해 채취한 혈액을 들어 보이고 있다. /부다페스트=AP연합뉴스


혈액에 대한 우울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은 20세기 초 현대 헌혈-수혈 체계의 기초를 다졌던 영국 여성 의학자와 공무원의 활약상을 소개하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피를 기증하고, 그 혈액을 병사들에게 보내고자 위험을 무릅썼던 자원봉사자들의 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하게 전한다.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의 습관을 치료에 활용하는 의사들, 중증외상센터에서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의료진의 모습도 만나볼 수 있다.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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