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림 ‘일월오봉도’ 뒷면에서 182년 전 과거시험 답안지가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창덕궁 인정전의 용상(왕의 의자) 뒤 ‘일월오봉도’를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배접지로 1840년 과거시험 탈락자의 답안 종이가 대거 사용된 것을 찾아냈다고 19일 밝혔다. 센터는 이 같은 보존처리 과정과 관련 연구 결과를 담은 ‘창덕궁 인정전 일월오봉도 보존처리’ 보고서를 함께 발간했다.
해와 달, 다섯 봉우리와 소나무, 파도치는 물결이 좌우대칭을 이루는 그림 ‘일월오봉도’는 영원한 생명력을 뜻하며 조선 왕실에서 왕의 존재와 권위를 나타낸다.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 창덕궁 인정전과 선정전 등 왕의 집무공간에 설치됐다.
창덕궁 인정전의 일월오봉도는 어좌 뒤에 설치된 4폭 병풍인데, 인정전이 일반 관람객들에게 개방돼 바깥 공기가 드나드는 환경에 노출되면서 화면이 터지거나 안료(顔料)가 들뜨고, 병풍틀이 틀어지는 등의 손상이 진행됐다. 이에 일월오봉도는 2015년 말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옮겨졌고 2016년부터 전면 해체 보존처리를 시작해 지난해 말 작업을 마쳤다.
일월오봉도 해체하니 과거시험 답안지 나와
해체된 ‘일월오봉도’의 화면 뒤에서는 그림을 지지하기 위해 붙이는 배접지와 1960년대의 신문지, 과거시험 답안지인 시권(試券)이 순서대로 겹쳐진 채 병풍틀 안에 들어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소가 고문서 전문가와 공동으로 배접지로 사용된 시권들을 조사한 결과 총 27장이 과거시험 답안지와 관련있음을 밝혀냈다. 27장 중 25장이 동일한 시험에서의 답안이며, 1840년에 시행된 ‘식년감시초시’의 불합격자 답안지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식년감시초시’는 조선 시대 3년에 한 번씩 치러진 과거시험 식년시와 생원시·진사시를 합쳐서 부르는 용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측 관계자는 “보존처리 과정에서의 이 발견을 통해 조선왕실에서 제작한 일월오봉도는 과거시험 탈락자의 답안지인 ‘낙폭지’를 재활용해 제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서 “일월오봉도 제작 연대가 적어도 1840년대 이후일 것이라 특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종이를 ‘재활용’했다는 점을 통해 왕실에서조차 종이 물자가 부족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 ‘안녕, 모란’ 특별전에서 공개된 왕실 여성의 예복 ‘활옷’의 경우, 빳빳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넣은 종이심을 이면지로 제작했음이 적외선카메라와 내시경 조사로 드러났다. 당시 활옷에 사용된 종이는 1880년 과거 시험의 답안지였다.
일월오봉도가 놓였던 국보 창덕궁 인정전은 1405년(태종5) 경복궁 동쪽에 지어졌으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소실돼 광해군 때 재건됐다. 순조 재위 시절 화재가 발생했고 18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위용을 다시 갖췄고 1857년 철종 때 보수공사가 진행된 기록이 남아 있다.
1960년대 신문지는 왜 나와?
1960년대 신문지가 발견된 것도 의외다. 인정전 일월오봉도는 지난 1964년 이후 다섯 차례에 걸친 보수가 진행됐으나 일부 수리·보존이었을 뿐 이번과 같은 ‘전면 해체’ 방식의 보존처리는 아니었다. 연구소 측은 “1960년대 일월오봉도를 처리할 때는 조선 시대에 제작된 기존의 병풍틀을 재사용해 부분 보수만 진행돼 지금까지 이어져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연구소는 ‘인정전영건도감의궤’와 ‘인정전중수도감의궤’, 1900년대 초 경복궁 근정전 일월오봉도와 덕수궁 중화전 일월오봉도의 유리건판 사진, 창덕궁 신선원전 일월오봉도 등 문헌과 사진, 유사유물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인정전 일월오봉도의 원래 모습을 최대한 되찾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병품 꾸밈인 장황을 녹색 구름 무늬 비단(녹색운문단)에 꽃문양 금박을 붙이는 등 의궤 속 모습으로 재현했다. 이번 일월오봉도 보존처리 보고서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누리집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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