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기 위해 반도체 수출 제한이라는 강력한 제재를 꺼내들 채비를 마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국내 주요 기업들은 대(對)러시아 수출 전선에 불똥이 튀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0일 로이터통신과 반도체 업계 등에 따르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 임원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반도체 수출 제한 등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할 준비를 마쳤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SIA는 회원사에 ‘조 바이든 행정부가 수출 제한을 포함한 모든 옵션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e메일을 발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SIA는 인텔이나 IBM 등 미국계 기업은 물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TSMC 등 미국 시장에서 활약하는 해외 기업도 회원사로 두고 있는 반도체 분야 이익 단체다.
반도체 업계는 이 같은 소식이 전달된 이래 지난 2018년부터 지금까지 기업 경영 전략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의 대중(對中) 제재를 떠올리며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업계는 최악의 경우 2020년 9월 미국 상무부가 화웨이를 정조준하며 미국의 기술과 장비를 이용해 제조한 반도체를 화웨이에 공급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했던 규제가 러시아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주요 거래처였던 화웨이에 반도체를 공급할 수 없게 되면서 상당 기간 혼란을 겪었다. 실제로 화웨이는 삼성전자의 5대 매출처에 항상 등장하는 이름이었지만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된 2020년 말 공시 자료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대신 그 자리는 반도체 도매상 역할을 하는 대만계 유통 기업이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미국 제재의 영향이 없다고 대외적 입장을 표명했지만 이는 경영 활동에 상당한 여파가 있었던 증거로 거론된다.
다만 반도체 업계는 제재 대상이 러시아라는 점에서 그 여파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가치 사슬에서 중국만큼 존재감이 뚜렷한 국가가 아니라는 점에서다. 그러나 실질적인 억제력을 행사하려는 미국이 러시아의 ‘아킬레스건’을 스마트폰이나 가전처럼 반도체가 필요한 시장으로 잡는다면 한국 기업들도 마냥 편하지는 않다. 러시아는 인구 1억 4,600만여 명을 보유한 거대 시장이자 인접 국가로 다수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 1위 기업인 삼성전자, 현지 프리미엄 가전 시장의 1인자인 LG전자가 등이 미국의 입을 바라보게 됐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회장은 “이번 제재가 현실화하면 러시아는 인텔·엔비디아 등 고성능 칩 수급 부족으로 5세대(5G) 통신 사업, 데이터 센터 등 주요 정보기술(IT) 인프라 사업 진행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며 “미국이 가진 반도체 자산이 엄청난 무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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