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수도 앙카라 시내 곳곳은 요즘 시위대로 어수선하다. 9일(현지 시간) 기준 리라·달러 환율이 달러당 13.60리라로 1년 전보다 2배 가까이 치솟으면서 생활고를 호소하는 이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탓이다. 이날 울루스 광장에서는 전기요금 고지서를 불태우는 퍼포먼스까지 벌어졌다.
터키의 경제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고물가에도 금리를 인하하는 청개구리 통화정책을 고수하던 터키 정부는 리라화 가치 하락으로 민심이 들끓자 급기야 ‘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누레딘 네바티 터키 재무장관은 “장롱 속 금을 은행 시스템에 끌어들이기 위한 프로그램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터키 정부는 금을 모아 필요할 경우 달러로 바꾼 후 시장에 공급해 떨어진 리라화 가치를 올려보겠다는 심산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얼마나 호응할지는 미지수다. 이날 한 투자자는 “금을 맡기면 이자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나중에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두 달 전에도 터키 중앙은행이 금 예금을 리라 예금으로 전환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저축 기간에 리라화 가치 하락에 따른 손실을 보상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했으나 반응은 미지근했다. 인플레이션에 따른 헤지(손실 위험 방지) 대책으로 금 보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전문직인 의사의 해외 탈출 러시가 나타날 만큼 현재 터키의 민심은 흉흉하다.
인플레이션에 따른 민심 이반은 선진국도 예외가 아니다. 공급난으로 에너지·식품 가격이 폭등한 미국과 영국에서는 연금 생활자들이 실질소득 감소로 인한 생활고를 호소하고 있다. 고물가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지지율을 재임 1년 만에 40% 초반대로 추락하게 한 원흉으로도 꼽힌다. CNN에 따르면 영국 웨스트런던 지역의 한 무료 급식소에는 최근 배급 대기자가 크게 늘고 있다. 식품·에너지 비용이 치솟자 기존에 찾지 않던 직장인들도 도움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노신사들이 길거리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는 모습은 이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다.
이와 관련해 10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원유·금속·곡물 등 국제 거래 상품 가격이 빠른 속도로 올라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의 정치적 불안이 우려된다고 보도했다. 금융 정보 업체 레피니티브의 원자재상품가격지수(CRB Index)는 지난달 말 271.23으로 전년 동월 대비 46% 넘게 올랐다. 이는 지난 1995년 이후 가장 큰 증가 폭이다. 원유와 에너지·알루미늄 가격 등이 가파르게 인상됐으며 커피·면화 가격도 각각 91%, 58% 올랐다.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정치적 불안은 사실 유래가 깊다. 2011년 ‘아랍의 봄’도 식료품 가격 인상이 원인이었다. 올 1월 카자흐스탄 사태의 발단도 정부의 액화천연가스(LNG) 가격 상한제 폐지였다.
다만 그때보다 더 큰 문제는 물가 불안에 따른 특정 국가의 ‘자원 민족주의’ 조치가 또다시 고물가를 자극하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태국에서는 돼지고기 가격이 50% 폭등하자 지난달 3개월간 돼지고기 수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돼지고기 가격 폭등은 사료로 쓰이는 콩과 옥수수 가격 인상을 촉발하며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는 실정이다. 인도네시아도 석탄과 팜유 수출을 한 달간 제한해 다른 나라의 원성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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