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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내팽개쳐진 민생

정영현 생활산업부장

거금도 농민들 양파값 폭락에 울상

정부는 이번에도 이상기후 탓만 해

울진화마도 여전히 참혹함 그 자체

정쟁에 뒷전 밀린 민생부터 보듬길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섬, 거금도. 조선왕조실록에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해 말 800여 필을 방목할 수 있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로 비옥한 곳이지만 요즘 거금도 농민들의 마음은 지옥 같다. ‘월급 빼고 전부 다 오른다’는데 애지중지 키운 양파 가격이 역으로 폭락한 탓이다. 백화점과 TV홈쇼핑·인터넷몰·식품회사 등이 팔을 걷고 나서 준 덕분에 출하 물량을 어느 정도 소화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양파 값이 지난해보다 70% 넘게 떨어지면서 결국 일부는 밭을 통째로 갈아엎었다. 열심히 키운 작물을 어떻게 해서든 시장에 내보내고 싶은 게 농부의 마음이지만 팬데믹 기간 치솟은 인건비와 물류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정부는 이번에도 이상기후 탓이라고 했지만 거금도를 비롯해 무안·제주 등지의 양파 농가가 밭을 갈아엎은 게 최근 10년 동안에만 도대체 몇 번인가. 예측 불가능의 영역이었다는 정부의 무책임한 변명을 뒤로한 채 농민들은 땅에 파묻혀 썩어가는 양파를 고통스럽게 지켜볼 뿐이다.

속이 타들어 가는 이는 거금도 농민만이 아니다. 섬에서 북동쪽 직선거리로 350여 ㎞ 떨어진 경북 울진 북면. 3월 들이닥친 화마는 여전히 마을 전체에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각계 각층에서 구호 물품과 성금이 답지했지만 보도 사진 속의 마을 풍경은 아직도 참혹함 그 자체다. 주저앉은 지붕과 덩그러니 벽만 남은 창고를 등진 채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노인의 뒷모습은 애처로운 정도가 아니라 위태롭다. 고개를 떨군 채 호미 삽날 끝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노인의 구부정한 등에 올려진 삶의 무게를 감히 가늠할 수 없다.



사라진 집터보다 노인을 더 숨 못 쉬게 하는 것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다 타버린 산이다. 산에서 나는 송이와 나물이 마을 노인들의 생계 유지 소득원이었다. 하지만 농작물들과 달리 임산물은 산불 피해 보상 산정이 쉽지 않다. 양파 농사는 빚을 질 각오만 하면 내년에 다시 시도라도 할 수 있지만 송이는 다시 채취하려면 3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하다. ‘기다려보자’는 동네 이장의 말을 믿는 게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나 다름없다.

절망의 기운은 농어촌 지역뿐 아니라 대도시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다. 한편에서는 명품 백과 미술 작품을 사기 위해 백화점과 화랑이 문을 열기 전부터 지갑을 들고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지만 또 다른 한편에는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워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3월 경기도 시흥에서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50대 엄마가 20대 발달 장애 딸을 숨지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말기 암 환자였던 엄마 역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자수했다. 그들의 집에서는 ‘다음 생에는 좋은 부모를 만나라’는 유서가 발견됐다고 했다. 같은 날 수원에서도 기초생활보장수급자 가정에서 8세 된 장애 아들을 엄마가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아이는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감염병이 약자를 먼저 공격하는 것을 알면서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 4만 달러를 꿈꾸는 나라의 복지 시스템은 이들을 구하지 못했다.

모두가 작금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사태를 핏대를 세워가며 성토할 때 밭을 갈아엎어야 했던 섬 마을 농부와 산불에 주저앉은 산골 노인, 자식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가난한 부모의 사정을 애써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은 이들이야말로 국가와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임을 새삼스레 한 번 더 호소하고 싶어서다. 가뜩이나 힘든 시절이다. 복잡한 그래프와 숫자를 내세우는 경제학자의 분석이 없어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밥상물가와 대출 이율 상향 변경 예고 문자만으로도 내일의 어려움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힘 없는 국민들의 절박함을 외면한 채, 글자 그대로 ‘민생’을 내팽개치고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억지를 부리고 물고 뜯고 싸우고 있는가. 지금 싸움의 죗값은 누가 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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