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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을 모방했던 젤렌스키 삶…비극을 해방 시킬까[책꽂이]

■젤렌스키(앤드루 L. 어번·크리스 맥레오드 지음, 알파미디어 펴냄)

드라마 '국민의 일꾼' 코미디언 출신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

러시아 침공하자 피난 대신 결사항전…'용감한 지도자' 각인

SNS 활용 "싸울 것""탄약 필요" 연설…서방 지원 이끌어내

선전전에선 푸틴에 압승…러 공격 막아내며 희망 불씨 살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석 달째 계속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속에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스타가 된 지도자다. 그의 결연한 표정은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대통령 당선 전까지 정치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선거 직후 영국 BBC 방송이 ‘모지리’라 칭한 걸 비롯해 여러 조롱을 받았지만, 이젠 그를 비웃는 이가 아무도 없다. 침공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전쟁은 젤렌스키로 대표되는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 앞에 장기전으로 흐르고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그는 국가 지도자의 필수적 덕목인 국민과 영토를 지키는 일에 실패했다. 러시아의 파괴적 공격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일부 영토는 러시아의 손에 장악됐다. 대부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체 혹은 일부를 항복이나 양도를 통해 지배하는 결말을 예상하지만, 젤렌스키는 계속 러시아를 자극하는 말을 한다. 그는 조국을 지키는 진정한 영웅일까, 우크라이나와 국민들을 판돈 삼아 러시아를 상대로 도박을 하는 무모한 몽상가일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연설 정치’는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다. 그는 지난달 1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화상연설을 했다. 국회사진기자단


신간 ‘젤렌스키’는 젤렌스키를 다루는 최초의 평전이다. 호주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앤드루 L. 어번과 크리스 맥레오드는 이 책에서 그의 어린 시절과 가족 이야기, 연예인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 각국 의회 연설, 인터뷰 등을 통해 젤렌스키의 모든 것을 생생하게 소개한다. 젤렌스키는 평범한 교사가 청렴한 대통령이 되는 내용의 정치풍자 드라마 ‘국민의 일꾼’에 출연하며 스타가 됐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해서 대통령이 됐다. 그가 속한 정당도 방송국 사람들을 주축으로 만들었다. 저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예술이 삶을 모방한 순간이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한 순간”이었다.

젤렌스키를 바라보는 저자들의 관점은 영웅적 행동의 용감한 지도자에 가깝다. 책 속의 “그 코미디언은 저항의 고삐를 놓치지 않고 있다. 그는 지금 분명 사람들을 웃기려는 게 아니다”라는 구절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젤렌스키는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기 직전인 2월 24일 공개한 영상 연설에서 “당신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 당신들은 우리의 등이 아니라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며 의지를 다진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호락호락한 지도자가 아니라 국내외 광범한 지지를 얻는 지도자와 맞닥뜨릴 첫 징후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수도 키이우(키예프)의 한 병원을 찾아 러시아군의 마리우폴 공격으로 부모 잃은 소년을 만나 격려의 악수를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저자들이 주목하는 젤렌스키의 특징은 소셜 미디어의 적극적 활용이다. 국가 최고 지도자의 동선은 보안사항이라 공개하지 않는 반면, 그는 매일 각종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드러낸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자신이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있다’는 걸 인증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동선과 함께 사진을 찍어 올리고, 트위터에는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적어놓으며,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통해서는 영상으로 연설을 한다.

또한 젤렌스키가 쇼비즈니스에서 갈고닦은 경험이 선전활동에서 러시아에 압승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도 드러낸다. 그가 때와 장소에 따라 맞춤형으로 연설을 준비하고, 널리 알려진 대중문화적 코드를 발언에 활용하는 모습은 이런 무대 위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미국의 피신 제의에도 영화 대사를 인용해 “여기는 전장이다. 나는 탄약이 필요하다. 도망칠 차량이 아니라”라 답한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반응하는지 체득한 사람의 언행이다. 또한 영국 의회 연설에서는 윈스턴 처칠의 연설을 원용해 “숲에서, 들판에서, 해안에서, 거리에서 우리는 싸울 것”이라 강조했고,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를 비롯한 참석자들의 기립박수를 끌어낸다. 미 의회에선 진주만 기습과 9·11 테러를 언급하더니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명언인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를 살짝 변형해 “나에겐 필요가 있습니다”라며 비행금지구역의 설정을 요청한다. 그의 연설 후 미국 내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여론이 커지면서 석유 금수조치와 추가적 원조 조치가 나온다. 우크라이나를 향한 서방의 무기 지원도 늘어났다. 책은 그의 미 의회와 유럽의회 연설문 전문을 각각 실어놓았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의 폭발 현장에 구급대원들이 출동해 수습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회담이 끝난 직후 키이우를 공격했다. 전쟁의 상황은 우크라이나에게 여전히 좋지 못하다. 키이우=AP연합뉴스


‘21세기 차르’로 불리는 푸틴은 정치 신인인 젤렌스키에게 적어도 선전전에서는 밀리는 모양새다. 러시아 자국 언론을 앞세운 여론전은 사실 왜곡이 드러나면서 게시물 차단 조치까지 당하고 있다.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역사가 300명의 스파르타인에 관한 전설이 되길 원치 않는다며 “우리는 우리 땅에 있다. 어떤 일이든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군사력의 차이는 냉엄한 현실이다. 그의 호소력 있는 말과 소셜 미디어라는 무형의 무기는 전쟁이 끝난 후 어떤 역할을 했다고 평가될까. 젤렌스키의 행보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한편 젤렌스키가 세계적 주목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나온 평전인 탓에 책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 러시아의 침공 전의 삶을 심도 있게 분석하지 못한다.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건 전쟁 시작 후 국내외적 정세, 러시아가 맞닥뜨린 전 세계적 제재의 물결, 양국 간 군사적 대립의 역사, ‘Z’가 러시아군을 지지하는 상징이 된 속사정 등을 간략히 소개하는 내용들이다. 전쟁과 관련된 개괄적인 지식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유용한 옵션이 될 만 하다. 1만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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