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성사를 깊이 탐구해온 고전학자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이번에는 1770년대 중반에서 1801년까지 초기 천주교회의 역사를 집대성한 신간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를 펴냈다. 치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해 국내 천주교계와 역사학계에 답습되어온 오류를 바로잡았고 논란과 쟁점의 검증을 시도했다. 여기서 ‘서학’은 기존 유학과 대비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 수입될 때는 학문으로서의 ‘서학’이었는데 점차 종교적 색채가 짙어지면서 ‘천주교’가 됐다.
책을 쓰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서학은 조선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과소평가돼온 느낌이다. 지축을 흔든 지진이 지나고 남은 흔적만으로 상황을 본 것은 아닐까. 의도적으로 은폐되고 지워져서 별일 없었던 것처럼 보인 것은 아닐까”고 말했다.
초기 서학·천주교 관련 자료는 기록 자체만으로는 진실에 다가서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당사자들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기록에서 내용을 검열·삭제했고 사건 관련자들도 실상을 은폐했다. 자료 기록자들도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굴절시켰다.
자료의 한계와 함께 그동안의 서학 연구도 현재 천주교계에서는 신앙 행위의 증거를 찾아 순교자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기 위해, 반면 역사학계에서는 서학의 흔적을 배제해 연구대상의 순정성을 지키기 위해 각각 편파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일부 비판과 비난을 분간하지 못하는 편협한 태도는 곤란하다. 천주교의 시선으로 다산 정약용을 살필 때나, 반대로 ‘만천유고’나 ‘성교요지’가 위작임을 논할 때 들은 어떤 비난들은 저주에 가까운 느낌마저 들었다”고 토로한다.
그럼에도 저자가 연구를 계속한 것은 조선 후기 서학의 연구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는 이유 때문이다. 서학을 무시하고는 조선 후기 역사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례로서 서학의 수용과 배척은 남인 내부의 전쟁으로 확산됐다. 개혁정치를 주장했던 정조 임금은 남인 출신으로 재상에 오른 채제공을 중심으로 당시까지 노론이 장악한 정국에 변화를 주고자 했다. 그러나 남인은 곧 채제공의 친위세력인 채당과 반채제공 전선인 홍당으로 분화됐다. 두 파의 분화에는 서학 문제가 핵심이었다. 채제공은 천주교도가 아니었지만 채당 내에는 천주교에 경도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것이 홍당 공세의 빌미가 됐다.
홍당은 노론과 손을 잡고 저항했다. 지지세력인 남인의 분열은 정조의 개혁 정치도 어그러뜨렸다. “서학과의 접촉은 조선 내부의 긍정적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되지 못하고 이후 (천주교 반대를 기치로 한) 위정척사의 명분 아래 세도정치에 날개만 달아준 셈이 됐다.”
책은 당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에 하나였던 정약용의 서학에 대한 입장도 소상히 밝혔다. ‘조선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평가되는 윤지충과 권상연은 조상의 신주를 태워 없애고 제사를 거부하면서 일어난 진산사건으로 1791년 사형당했다. 천주교를 믿던 정약용은 이 사건 이후 제사를 거부하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공식적으로는 배교를 선언했다. 그런데 2021년 발굴 공개된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에서 정약용의 글씨가 적힌 부장품 사발이 발견됐다.
이 사발을 통해 저자는 “정약용이 배교를 공언한 뒤에도 신앙생활을 놓지 않았고 드러나지 않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고 적었다. 이와 관련 정약용은 1795년 주문모 신부 체포 실패 사건 당시 신부를 탈출시킨 실제 장본인으로 증명됐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그 전해에 입국해 포교를 했는데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 사형된다.
책은 다른 중요한 쟁점들에 대해서도 정리를 한다. 이벽 및 정약용 형제와 교분을 맺으며 천주교 신앙을 발아들인 김범우는 1785년 천주교 집회가 적발된 서울 명례방 사건으로 귀양을 가서 이듬해 유배지인 충북 단양에서 죽었다. 명례방 사건은 최초의 천주교 탄압사건이다. 그런데 경남 밀양 단장면에서 김범우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그의 실제 유배지 논쟁이 일어왔다. 저자는 김범우의 유배지가 충북 단양이 분명함을 밝혀냈다. 김범우가 유배지에서도 천주교를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지역 전파의 주요 쟁점이 해결된 셈이다. 4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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