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이 약 2300여 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요배·박노수·황창배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도 다수 소장하고 있지만 취득금액은 수백만원에 그쳐 제대로된 감정·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은행의 경우 소장 미술품의 32.8%가 장부가 1000원 이하였다. 미술계에서는 공공 문화향수권 증진 측면에서 국책은행들이 소장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대중과 공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3일 김한규 의원실에 따르면 2022년 8월말 기준 기업은행( 1159점)과 산업은행(1104점)은 총 2263점의 미술품을 소장 중이다. 취득가 총액은 기업은행이 약 44억 8500만 원, 산업은행이 25억 7800만 원으로 총 70억 6300만 원이었다.
소장품 중에서는 경매가 수천만 원대 작가의 작품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기업은행이 1995년 450만원에 취득한 강요배 작가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기업은행은 박노수(1982년 취득, 345만 원)·배렴(1994년 취득, 450만 원)·황창배(1995년 취득, 1200만 원) 작가의 작품도 소장 중이었다.
전문가들은 국책은행이 보다 적극적으로 미술품을 대중과 공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술 시장 규모가 1조 원을 넘어서는 등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국책은행도 공공 문화향수권 증진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재욱 열매컴퍼니 대표는 “은행의 경우 (미술품) 자체 매입 외에도 담보물 등의 경로로 취득한 경우도 많을 것”이라며 “작품 수가 많으니 전문가 감정을 받아보면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 발굴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소장품을) 무작정 묵히기 보다 대중과 공유할 수 있다면 더 큰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김한규 의원 역시 “국책 은행들이 미술품을 사무실 전시나 단순 소장 목적으로 천 점이 넘는 미술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은행들은) 미술품을 국민들과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소장 미술품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홈페이지에 소장 미술품 사진과 작가, 제작연도 등을 공개하고 한국은행 산하 화폐박물관을 통해 전시하는 방식이다. 소장 목록이 공개돼있어 학술 연구는 물론 대중 전시를 위한 활용도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한편 이를 위해 국책은행이 미술품 관리 체계부터 정비해야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모조품과 진품 여부를 구분하지 않고 소장품 목록을 관리 중인데다 1000원 이하의 염가로 장부에 기록해 둔 경우가 상당해서다. 기업은행이 김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기업은행 소장품 목록에는 김환기·김창열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뿐 아니라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이름도 적혀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의 취득가는 김환기·김창열 작가 작품이 140만 원, 모네 작품이 20만 9000원에 불과하다. 진품이 아닌 모사품이기 때문이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진품과 장식용 모사품이 섞여 관리되고 있는 셈이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따로 예산을 편성해서 미술품을 구입하거나 시세 차익을 노리고 (미술품을) 매입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소장품의 회계 처리는 ‘업무상 비품’”이라고 설명했다.
산업은행은 소장 작품 중 장부가가 1000원 미만인 작품이 362점으로 전체의 31.8%에 달했다. 수십년 전 제대로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입수해 0원·100원·1000원 등으로 기록된 뒤 여전히 그 상태로 방치해 둬서다. 2000년대 이후 입수한 작품들도 특별한 이유 없이 취득가를 0원·1000원으로 기록한 사례가 11건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2000년 이전에는 전산 시스템이 없어서 생긴 문제”라며 “최근 0원으로 기록된 작품들은 기증받은 작품”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한 미술계 관계자는 “수십년째 보관만 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다는데 (은행들이) 무슨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며 “취득경로와 진품여부 등 체계적인 관리 목록을 만드는 것부터 우선”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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