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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서

송영규 선임기자

참사 현장엔 미안하단 메모 가득

책임져야 할 이들은 변명·외면만

사회는 벌써 좌우 대결로 치달아

제대로 된 원인·책임 소재 밝혀야

송영규 선임기자




생지옥이 펼쳐진 후 보름. 무거운 마음을 안고 158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 현장을 찾았다. 이태원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1번 출구 방향으로 돌아서자마자 마주한 벽면 가득한 메모지들과 추모 글. 계단을 올라가며 하나 하나 읽어본다.

한 메모에 눈길이 멈춰졌다. 찢어진 종이에 삐뚤삐뚤 쓴 글씨. ‘제가 너무 힘이 약했나 봅니다. 위에(있던) 사람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아무리 힘을 써도 빼드릴 수 없었네요… 죄송합니다….’ 참사 당시 사람들을 구하려 애썼던 한 노숙자가 쓴 글인 듯 하다. 외국인이 남긴 메모도 보인다. ‘Your loss is Humanity’s loss(당신의 죽음은 곧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거의 매일 글을 남겨 놓은 이도 있다. ‘오빠 언니 안녕.’ '나 그제 시험 100점 맞았다. 정말 미안해.'

참사 현장 건너편으로 건너 갔다. 환전소 앞에 한 가득 놓인 국화꽃들. 입구에 글이 써 있다. ‘조문을 못하신 분들을 위해 꽃을 준비했으니 한 송이 씩 가져가세요.’ 사장님에게 “많이 힘드시죠”하고 말을 건넸다. '매일 눈물만 나와. 어떻게 저런 일이… 12명에게 인공호흡을 한 사람은 매일 근처에 와서 통곡을 하고 가. 마치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책임 져야 할 이들이 자기 탓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세상에서 죄책감은 국민의 몫인가 보다.

다시 1번 출구로 발길을 옮긴다. 깨끗이 치워진 골목길. 슬픔도 같이 사라졌을까.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 참사 현장인 헤밀턴 호텔 옆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청년, 메모지를 어루만지며 하늘만 바라보는 중년의 여성. 국가애도기간은 1주일 전에 끝났지만 1번 출구는 마치 아직 우리는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다고 얘기하는 듯 하다.



그럴 만도 하다.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허탈감과 분노가 몰려왔으니. 참사 후 정부의 첫 반응은 ‘주최자 없는 행사 안전 대책 강구’였다. 적어도 초창기 정부에게 이번 참사는 이태원에 ‘놀러 간’ 아이들이 좁은 골목으로 몰리면서 발생한 우발적 사고였다. ‘참사 희생자' 대신 ‘사고 사망자’로 표현한 것도 다를 바 없다. 기자들 앞에서 농담하는 총리, “경찰과 소방 인력 배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고 했던 것도 모자라 이번 참사를 ‘폼 나게 사표’ 던지는 정도로 생각하는 주무 부처 장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장관 바꿔라, 이것도 후진적'이라는 대통령 비서실장의 모습을 보면 세월호 참사 때 ‘교통사고’ 운운했던 어떤 정치인이 떠오른다. 여기에 뒷짐 지고 걸어가는 경찰서장, 현장 점검을 했다고 거짓말 한 구청장까지. 국민들이 분노하지 않고 슬퍼할 겨를이 있었을까.

슬픔을 이겨내는 데 가장 큰 힘은 ‘공감’이라고 한다. 지금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은 공감은커녕 화만 북돋을 뿐이다. 이태원역 1번 출구의 추모객들이 보여준 애끓는 눈물을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한 방울이라도 보여준 적이 있던가. 대통령이 5번이나 고개를 숙일 동안 나머지는 그저 남의 일이고 먼 나라 일로 바라봤다. 현장에서 죽기 살기로 뛰어다니며 인명 구조에 나섰던 용산소방서장이 4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정부보다 못한 게 뭐 있나.

진작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사람은 따로 있지만 버티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측근이라서 그럴 수도, 이번에 밀리면 국정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판단일 수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잘못된 트라우마 때문일 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과정에서 이번 참사가 정치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벌써 SNS 공간에서는 이태원 참사에 ‘좌빨(좌익 빨갱이)’ 또는 ‘정권 퇴진’의 딱지를 붙고 있다. 사회가 더 격렬하게 갈라서고 있다.

현 정부는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탄생했다. 6개월이 지났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지 물어볼 때가 됐다. 이태원 참사의 원인 규명과 제대로 된 책임자 처벌은 그 가늠자가 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이태원역 1번 출구가 슬픔과 분노의 벽으로 남을 지, 공감과 화해의 장이 될 지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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