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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조국 되찾으려 평생 헌신…숭고한 희생정신 늘 되새기겠다"

■오늘 윤봉길 의사 순국 90주기

기념사업회, 보훈처 등과 추념식

윤봉길(왼쪽) 의사와 김구 선생. 사진 제공=국가보훈처




'훙커우 공원 의거'로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매헌 윤봉길 의사의 순국 90주기 추념식이 19일 오전 11시 서울 효창공원에서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다고 국가보훈처가 18일 밝혔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명노승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회장을 비롯한 기념사업회 회원, 독립유공자 유족 등 200여 명이 참석한다. 추념식은 국민의례, 약전 봉독, 추념사, 헌화·분향, 유시 낭독, 추모가 순으로 진행된다.

190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윤 의사는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거부해 덕산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사설 서당인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28년 부흥야학원을 세워 농민 자녀를 교육했으며 이듬해 월진회를 조직해 농촌운동을 전개했지만 일제의 압박으로 한계를 깨닫고 193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 투쟁의 결의를 다지고 이듬해 4월 26일 김 선생이 주도한 한인애국단에 합류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인 덴초세쓰(天長節·천장절)을 맞아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 경축식이 열린 홍커우공원(虹口公園·홍구공원)에서 오전 11시 40분께 수통형 폭탄을 단상 위로 투척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가와바타 사다지 거류민단장이 사망했고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 시게미쓰 마모루 공사 등이 크게 다쳤다.



윤 의사의 의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중국이 지원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의거 직후 윤 의사는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상하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당했으며 다음 달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해 12월 19일 윤 의사는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총탄을 맞고 25세로 순국했다.

순국 전 강보에 싸인 두 아들에게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돼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김구 선생의 요청에 따라 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1946년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윤봉길 의사 순국 90주기를 맞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생을 바친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혼을 엄숙한 마음으로 되새기며 우리 국민이 그 숭고한 뜻과 정신을 언제나 기억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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