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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저항 '백장미단' 마지막 생존 단원 별세…향년 103세

뮌헨서 젊은 학생 주축으로 창설된 '백장미단'

라프렌츠, 백장미단서 전단나르는 등의 활동 펼쳐

100세 생일에 독일 정부로부터 공로 훈장 받아

100세 생일에 독일 정부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은 라프렌츠. 독일 외무부 트위터




전 세계를 전쟁의 공포에 몰아넣었던 독일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백장미단'의 마지막 생존자 트라우테 라프렌츠가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103세.

10일 AFP 통신과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에 따르면 백장미 재단과 라프렌츠의 아들인 마이클 페이지가 그가 별세했다고 밝혔다.

백장미단은 1942년 여름 뮌헨에서 젊은 학생들이 주축이 돼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전단을 배포하고 그라피티를 남겨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인들의 저항을 촉구했다. 또한 이들은 전단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을 인용하고 나치 정권의 범죄나 유대인 학살 등을 고발했다. 어둠을 틈타 거리에 "타도 히틀러"와 같은 슬로건을 그려넣기도 했다.

1919년 5월생인 라프렌츠는 함부르크 의대생 시절 백장미단을 결성한 알렉산더 슈모렐과 한스·소피 숄 남매를 만나 뮌헨으로 옮겨 갔으며 백장미단 활동 중에는 전단을 나르고 잉크와 종이, 봉투를 확보하는 역할을 맡았다.

뮌헨대 건물 앞 거리에 있는 백장미단 추모석. EPA연합뉴스




1943년 2월 18일 한스와 조피 남매는 뮌헨 대학 구내에서 히틀러의 만행을 고발하고 독일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전단을 뿌리다 체포됐다. 곧바로 나치 정권의 정치경찰이었던 게슈타포에 연행된 두 사람은 잔인한 고문과 함께 취조를 받고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라프렌츠는 1943년 3월 체포됐지만 1년 복역 후 석방됐다. 하지만 곧 다시 체포되는 등 1945년 4월 독일이 패전할 때까지 경찰 조사를 받거나 감옥을 들락날락 하는 삶을 이어 갔다.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해 의학 공부를 마쳤으며 안과의사인 버넌 페이지와 결혼해 네 자녀를 뒀다. 20여 년간 에스페란자 특수학교의 교장을 맡았고 인지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2019년 5월 3일 라프렌츠의 100세 생일에 그에게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당시 라프렌츠를 "국가사회주의의 범죄에 맞서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독재와 유대인 학살에 저항하는 용기를 지닌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라며 "자유와 인류애의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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