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시장이 우려했던 것보다 큰 동요 없이 안정적 모습으로 마무리되자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가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인 빠른 정책 대응을 호평했다. 외생변수에 취약한 우리 입장에서는 SVB와 같은 돌발 변수에 시장 불안감이 커질 수 있었지만 한 시름 던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가 나서서 시장의 약한 고리가 터지지 않도록 시장의 불안을 달래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들은 정부가 시장에 대한 모니터링뿐 아니라 우리 경제의 잠재 폭탄으로 꼽히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가계부채, 가상화폐 등의 시장에서 선제 정책 대응을 주문했다. 김창규 다올인베스트먼트 대표는 “핀테크가 발달한 현 시점에서 뱅크런이 하나 터지면 번지는 속도가 어마어마하다”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곧바로 SVB 예금을 전액 지급 보증하도록 해 위기의 불씨를 빨리 제거한 것이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일단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전방위로 확산되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장(전 금융위원장)은 “고금리 장기화로 SVB 파산이 불거졌지만 대형 은행으로 위기가 확산되는 식의 시스템 위기로 전이될 가능성은 낮다”며 “그래서 초장에 위기를 확실히 잡는 게 중요한데 미국 정부의 정책 판단이 좋았다”고 진단했다.
전 원장은 그러면서 “SVB 사태가 우리에게 발생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며 “우리 경제의 약한 고리가 불쑥 튀어나올 가능성에 (정부가) 항시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부동산 PF 문제뿐만 아니라 한계기업의 상환 부담이 가중되고 있고 차입 비중이 큰 스타트업 문제도 나타날 수 있다”며 "이런 우리 경제의 약점과 강하게 연결된 저축은행·지방은행 등 재무건전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금융기관에서 탈이 날 수 있는 만큼 당국이 철저하게 모니터링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짚었다.
아직 안심하기보다는 경계의 날을 바짝 세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이번에는 벤처 생태계가 미국의 핵심 성장동력이라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빠른 지원에 나섰지만 가상화폐 전문 특수은행들이 파산과 부도가 났을 때 똑같이 연준이 지원해줄지는 회의적”이라며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고 경각심을 촉구했다.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게 정책 당국의 판단 미스다. 지난해 레고랜드발(發) 자금시장 경색, 흥국생명의 영구채 콜옵션 연기 사태 등은 정부가 ‘뒷북 대응’으로 위기를 키운 사례들이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결국 부동산 가격 안정으로 우리 경제의 뇌관인 가계부채와 부동산 PF를 연착륙해야 한다”며 “이들 대출의 부실화가 또다시 불거져 증권회사들이 흔들릴 경우 레고랜드 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파국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SVB 사태로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을 둘러싼 압박은 줄었지만 외환시장의 급격한 쏠림은 여전하다. 이날도 원·달러 환율은 전날 대비 22.4원이나 빠졌다. 이달에 미 통화 당국이 베이비스텝(0.25%포인트 금리 인상)을 밟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관측으로 환율이 하락했지만 외환시장은 미국 움직임에 따라 롤러코스터 장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윤건수 DSC인베스트먼트 대표는 “현재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 시장 역시 금리와 환율을 두고 악재와 호재가 뒤섞여 혼란스럽다”며 “유언비어 하나에도 시장 전체가 뒤집힐 수 있는 만큼 정부의 시장 관리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도 이날 수출투자책임관회의를 통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금융·외환시장에 대한 모니터링, 실물경제에 대한 부정적 영향 최소화 등을 대책으로 내놨지만 2% 부족하다는 평가다. 벤처시장에서는 SVB 폐쇄로 이 은행에 자금이 묶인 국내 기업과 벤처캐피털 등에 대한 대책 등 손에 잡히는 실질적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전직 국책연구기관장은 “경기 부진으로 우리의 스타트업 생태계도 위축된 상황”이라며 “이번 사태로 관련 기업이 자금 경색과 도산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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