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77세 화가가 있다. 그는 최근 40여 년간 한 몸이자 밥벌이 도구였던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MZ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진 ‘아이패드 드로잉’을 시작했다. 서양화가 한운성 이야기다.
한운성은 과일과 꽃, 관광지의 풍경을 철저하게 사실적으로 그리는 작가로 유명하다. 유명 관광지를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후 전체가 아닌 ‘앞 면’만 그림으로 그려내는 ‘디지로그 풍경’, ‘과일채집’ 연작 등은 그가 얼마나 눈에 보이는 사실을 화폭에 담아내는 것을 중시하는 지 알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런 그가 붓을 내려놓고 아이패드 펜슬을 든 건 지난해. 건강이 좋지 않았고 특히 팔을 움직이기 어려워 수채화 작업이 쉽지 않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까지 내려놓을 수 없던 그에게 제자들은 ‘아이패드 드로잉’을 권했다. 아이패드 드로잉은 실제와 같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작업을 위한 툴(tool)의 주요 기능을 익혀야 하고, 고난도의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서는 앱 내에서 붓과 물감 등을 구매도 해야 한다. 연필처럼 생긴 애플 펜슬을 손에 쥐고 마치 붓을 든 것 마냥 필압을 조절하는 것은 ‘디지털 세대’라고 불리는 MZ세대에게도 쉽지 않다.
작가는 지난해 2월 처음 아이패드를 구입한 후 유튜브 영상을 통해 3개월 여간 독학으로 기능을 익혔다. 여러 툴을 통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는 꼬박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한 점당 수천 만 원을 호가하는 그의 작품은 판화처럼 10점 한정의 아이패드 드로잉으로 재탄생 해 서울 송현동 이화익 갤러리에 걸렸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아이패드 드로잉 30여 점을 처음 공개했다. 작품은 판화지에 프린트로 전시돼 마치 진짜 붓으로 그린것처럼 생생하다.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고유물로 여긴다. 작품이 시장에서 직접 판매되고 오랜 시간 회자되니 당연한 일이다. 하나의 작품을 복사물처럼 여러 점 발행하는 ‘아이패드 드로잉' 방식에 거부감이 들 만도 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새로운 작업을 즐겼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1992년 일간지에 이문열의 소설 ‘오디세이아 서울’에 컴퓨터를 이용한 삽화를 발표하는 등 꽤 오래 전부터 디지털 작업 도전을 즐겨 왔다. 두 개의 손가락으로 그림을 확대해 세밀하게 표현하고, 원본을 변형하는 것도 붓으로 그리는 작업으로는 느낄 수 없는 쾌감이었을 게다. 작가는 “매체가 무엇이든 본질은 같다”며 "재료만 바뀌지 기본적인 것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전시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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