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생산량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고는 10여 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줄이고 있음에도 유가가 하향세를 띠고 있다. 시장의 ‘큰손’인 중국의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데다 러시아를 비롯해 이란·베네수엘라 등이 서방의 제재 속에서도 원유 공급을 늘리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11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골드만삭스는 이날 세계 원유 시장의 벤치마크인 브렌트유의 올해 말 전망치를 배럴당 86달러로 조정했다. 이는 지난해 12월 전망치인 배럴당 95달러에서 9달러나 낮아진 것으로 최근 6개월 동안 세 번째 하향 조정이다.
브렌트유는 올해 들어 미국의 경기 둔화 및 중국의 부진한 회복 등과 맞물려 13%나 내려갔다. 최근 사우디가 독자적으로 7월 한 달간 하루 100만 배럴의 추가 감산을 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유가는 단 하루만 반응했을 뿐 다시 잠잠해졌다. 유가 하락에 베팅한 시장 참여자들이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 압둘아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장관의 엄포가 무색해진 것이다.
사우디의 깜짝 감산에도 유가가 더 이상 요동치지 않는 것은 글로벌 경기 둔화에 대한 우려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즈호은행의 비슈누 바라탄 경제전략헤드는 “우리는 수요 리스크가 사우디의 유가 부양 능력을 압도할 수 있는 시점에 와 있다는 데 기꺼이 베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원유 시장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중국의 경기 회복 속도다. 이는 수요를 견인하는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5월 중국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48.8로 ‘제로 코로나’ 규제를 받던 지난해 12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블룸버그는 “중국 경제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중국은 원유 재고가 상당하다”면서 “최근 산유국들의 감산은 (중국의) 재고를 낮추기 위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고 전했다.
공급 측면에서도 산유국들의 감산 효과는 러시아의 원유 거래 증가 등으로 반감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러시아·이란·베네수엘라 등 제재를 받는 국가들의 공급 증가는 국제유가 하락 전망의 핵심 동력”이라며 “특히 러시아는 원유 공급량이 거의 완전히 회복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에 따르면 서방의 제재 속에서도 올해 들어 5월까지 러시아의 휘발유 수출은 37%나 늘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이 러시아 원유 수입을 중단했으나 인도·중국 등에서 여전히 러시아와의 거래가 왕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파키스탄 역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시작했다고 이날 밝혔다.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이와 관련해 “파키스탄과 러시아 연방 간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거래는 최악의 경제난을 극복하려는 파키스탄과 미국·유럽에 맞서 원유 판로를 넓히려는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데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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