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우리에게는 집에서 직접 술을 빚어 마시는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있었다. 한두 잔의 술은 피로를 풀고 식욕을 돋웠다. 집집마다의 특색이 담긴 가양주는 손님에게 내어주기도 좋았다. 하지만 가양주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가양주를 밀주(密酒)로 삼고 금지하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혜인(43·사진) 밝은세상영농조합 대표는 “평택에서 정미소를 운영한 조부모 덕에 집안에 막걸리를 만들어 마시는 문화가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 전통주와 평택을 알리고 싶다는 열망으로 한 가족이 합심해 가양주를 브랜드화하기 시작해 2009년 평택 지역 특산주 ‘호랑이배꼽 막걸리’를 런칭했다. 지난 7일 라이프점프는 경기도 평택 포승읍에 위치한 양조장에서 이혜인 대표를 만나 지역에서 스몰 브랜드를 꾸리며 사는 삶에 대해 들었다.
온 가족이 합심해 만든 술
이 대표도 여느 지역민처럼 취업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한 스포츠매체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이후 한국 메이저리그를 전담하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미국에 머물렀다. 그는 외국인들이 어디서 왔냐고 물을 때마다 ‘코리아’ 대신 ‘평택’이라고 답했다. 함평 이씨 일가가 고려시대부터 집성촌을 이룬 고향 평택에 그만큼 애착이 강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 이계송 화백은 밝은세상영농조합을 창업하고 양조장을 만들던 참이었다. 이 화백은 작품 활동으로 유럽 등 전세계를 다니며 지역마다 발달한 술 문화를 접했다. 그 문화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술 제조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 대표도 그 일에 동참했다. 어머니인 이인자 요리 연구가는 뛰어난 미각으로 맛보는 역할을 도맡았다. 여성 속옷 디자이너로 15년 일한 언니 이혜범씨도 합류해 브랜드 굿즈 등을 만들게 됐다. 집안의 막내 이 대표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대표’가 됐다. 술을 만드는데 온 가족이 뭉쳤다.
와인 제작 방식 도입…생쌀을 발효해 만든 막걸리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단연 좋은 재료다. 막걸리의 맛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좋은 재료에 더해 시간이 필요하다. 싸게 공급되는 대부분의 시판 막걸리는 묵은 정부미를 사용하거나 수입쌀을 활용한다. 하지만 호랑이배꼽 막걸리는 가을에 수확한 신선한 평택의 햅쌀을 활용한다. 고두밥(증기에 찐 밥)이 아닌 생쌀을 발효한다. 끓인 배즙과 생배즙 맛이 다르듯이 ‘익히지 않은 쌀도 술이 될까’란 호기심에 와인 제작 방식을 막걸리에 접해본 것이다.
만드는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2008년 어느 날, 가족이 모여 앉아 항아리에서 첫 술을 퍼냈다. 첫 마디가 ‘왜 이렇게 맛이 없어’였다. 항아리를 창고에 넣어두고 잊었다. 3개월가량이 흐른 뒤 다시 한 입 마시니 입에 기분 좋은 달달한 맛이 돌았다. ‘좋은 술에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깨달았다. 호랑이배꼽 막걸리는 생쌀을 으깨 70년 된 흙집에서 40일 발효하고, 60일 동안 저온숙성하며 만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인공 첨가물은 전혀 넣지 않는다.
브랜드 이름을 ‘호랑이배꼽’으로 지은 것은 막걸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던 탓이다. 막걸리는 대부분 주요 원재료나 지역 이름을 따 보통 ‘○○ 막걸리’라고 짓는다. 그는 막걸리에 지역 특색을 재미나게 담고 싶었다. 평택이 한반도의 배꼽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에 착안해 이름을 ‘호랑이배꼽’으로 지었다. 아저씨들이 주로 마시는 ‘아재술’이란 고정관념도 깨고 싶어 귀여운 캐릭터도 만들었다. 브랜드 캐릭터 ‘꼬비’가 탄생했다.
만드는 것은 파는 것과 달라
2008년 지역 특산주 주류제조면허를 취득하고, 운 좋게 2014년에는 경기농식품진흥원 스타브랜드로 선정됐다. 2017년 경기미 가공식품경연대회에서 우수상도 탔다. 2018년도에는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주관하는 ‘찾아가는 양조장’에도 선정됐다. 하지만 파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가지런히 전시되는 다른 술과는 달리 매대 한쪽에 방치되어 있던 술이 막걸리였다. 매대의 온도 관리도 잘 안돼 거품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경우도 흔했다.
소비자의 반응도 좋지 않았다. 지금이야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청년층 사이에 입소문이 났지만 막걸리가 세상에 나온 2009년 당시에는 ‘막걸리는 싼 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1000원짜리 막걸리도 있었으니, 당시 프리미엄 막걸리로 출시한 호랑이배꼽 막걸리는 당연 비싸다는 혹평을 들었다.
박리다매를 꿈꾸고 창업한 것이 아니다 보니 사업가 마인드도 부족했다. ‘내 고향을 알리고, 우리 농산물을 활용하는 좋은 일을 하자’ 다짐하다 보니 욕심을 내지 말고 소소하게 운영하는 것이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리 좋은 일이더라도 욕심내지 않으면 순수한 의도에 끝나고 만다. “고향, 우리 농산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나이에 맞게 브랜드가 커나가지 않으면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며 깨닫게 됐어요.”
스몰 브랜드, 광야에서 내 취향과 맞는 사람을 찾는 일
어느새 첫 막걸리를 런칭하고 14년이 흘렀다. 그 사이 쌀로 만든 증류주 ‘소호’와 새로운 막걸리 ‘에피소드’도 출시했다. 그는 지역의 원재료와 생산자를 담아 제대로 된 지역 상품을 만드는 ‘동네 선배’고 싶다. 맛과 좋은 원료, 이야기가 담겨 있다면 그 브랜드는 사람들이 찾을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스몰 브랜드엔 이 지역에 살아가면서 만들어진 나의 이야기가 녹아들어야 하는 것 같아요. 브랜드에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개인이 사랑하는 것을 담아내는 거죠. 그러면 알아주는 사람이 생겨요. 고향에서 이렇게 사업을 한다는 건 ‘광야에서 내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드는 일’과 같다고 생각해요.”
시대도 변했다. “요즘 프리미엄 막걸리도 많이 나오는 등 술 트렌드가 변하고 있어요. 스토리가 있고, 개성 있고, 정성이 담기면 소비자가 찾아주는 시대가 됐죠.”
흔히 식사에 술을 곁들일 때 “맥주 먹을래, 소주 먹을래”라고 묻는다. 이 대표는 전통주가 빠진 것이 아쉽다. 직접 가양주를 만들어 전통주를 자연스레 마셨던 시절이 있듯이, 요즘 세대도 전통주를 쉽게 즐겼으면 하는 게 이 대표의 꿈이다. 그는 소망한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맥주, 소주, 전통주 중에 뭐 먹을래”라고 말하길 말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