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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 4기 진단에 망연자실하던 60대 환자, '렉라자' 무상 공급 덕에 희망 찾아"

■ 장태원 고신대복음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인터뷰

고신대복음병원, 전국에서 가장 빨리 '렉라자' EAP 가동

2주만에 IRB 승인 절차 완료…24일 EAP 1·2호 환자 나와

해외에선 3세대 약물 처방 비중이 80%…"한국도 머잖았다"

장태원 대한폐암학회 회장이 3세대 폐암 치료제의 1차치료제 도입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고신대복음병원




"정말 약값을 한푼도 안 내도 되는 거에요?"

“그렇다니까요. 약값은 회사에서 부담한다고 하니, 진료비만 내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

“약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고 하던데요. 이렇게 고마울 때가! ”

"흔치 않은 기회인데 정말 운이 좋으셨습니다. 환자 분은 앞으로 비용 걱정 없이 치료에만 전념하시면 됩니다."

24일 부산 서구 고신대복음병원 호흡기내과 외래진료실. 김 모씨(63·남)와 보호자가 장태원 호흡기내과 교수(대한폐암학회 회장)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문을 나섰다.

◇ 1기 인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4기’…EAP 1호는 60대 폐암 환자


김씨는 약 한달 전 건강검진차 시행한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에서 폐결절 소견을 보여 장 교수를 찾았다. 정밀 검사 결과 내려진 진단명은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돌연변이를 동반한 폐선암(adenocarcinoma) 1기. 폐에 발생한 악성 종양은 조직형에 따라 크게 소세포폐암(SCLC)과 비소세포폐암(NSCLC)으로 나뉜다. 전체 폐암의 80%를 차지하는 비소세포폐암은 조직형에 따라 다시 선암, 편평상피세포암, 대세포암 등으로 나뉜다. 선암의 '선'은 체액을 분비하는 기능을 가진 세포를 지칭하는데, 조직검사 결과 이러한 종류의 세포에서 암세포가 발생했다고 판단될 때 선암이라고 부른다. 국내 발생 비율을 살펴보면 전체 비소세포폐암의 약 60%가 선암, 그 중 30~40% 가량에서EGFR 돌연변이가 발생해 전 세계적으로도 비중이 높다.

김씨와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암 진단에 당황스러웠지만 초기 단계라 수술이 가능하다는 말에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부랴부랴 수술 일정을 잡았다.

수술 당일, 눈을 감았다 뜨면 ‘수술이 잘 끝났다’는 말을 듣기만 고대하던 김씨는 마취에서 깨어나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수술장에 들어가 가슴을 열었는데 '늑막 전이'가 발견되어 수술을 진행하지 못했다는 것. 암이 폐에만 존재하는 1기와 달리, 4기는 반대쪽 임파절을 넘어 멀리 떨어진 장기로 전이된 상태다. 수술이 어려워 항암화학요법을 시행해야 하고, 필요에 따라 방사선치료도 병행해야 한다.

모든 고형암이 그렇듯, 폐암 역시 병기가 진행될수록 생존율은 급격히 낮아진다. 처음 김씨가 진단 받았던 1기의 경우 평균 생존기간(중앙값)이 43~60개월, 5년 생존율은 50% 수준이다. 그에 비해 4기는 생존기간(중앙값)이 6개월 남짓에 불과한 데다 5년 생존율이 5%에도 못 미친다. 실제 임상 현장에서는 김씨처럼 막상 수술장에 들어갔을 때 조직검사를 통해 확인된 병기가 임상적 병기와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 말기 폐암 환자에게 찾아온 기적…고가 항암제 무상공급 약속한 제약사


"4기면 말기 아닌가요?"

망연자실하는 김씨에게 장 교수는 "EGFR 돌연변이를 동반한 비소세포폐암의 경우 표적항암제가 1~3세대까지 개발되어 있다"며 "3세대 약물은 암진행을 2년 가까이 지연시킬 정도로 종양억제 효과가 뛰어난데 약물을 무료로 처방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 이용도 가능하다"고 소개했다.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3세대 약물은 아직 건강보험 적용이 되질 않아 1년에 7000만 원 상당의 약값이 소요됐는데, 최근 국내 기업이 건강보험 적용 전까지 의약품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동정적사용프로그램(EAP)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 효과 좋은 3세대 폐암약, 1년 약값만 7000만원…'그림의 떡'




장 교수가 소개한 신약은 유한양행이 개발해 지난 2021년 1월 국내 31번째 신약으로 허가받은 '렉라자'다. 폐암 세포의 성장에 관여하는 EGFR 수용체의 신호전달을 방해해 폐암 세포의 증식과 성장을 억제한다. 그동안 '이레사', '타쎄바' 등 1, 2세대 약물을 복용하다 T790M 내성이 생긴 폐암 환자에게 2번째 옵션으로 투여되어 왔던 렉라자는 지난달 말 EGFR 엑손 19 결손 또는 엑손 21(L858R) 치환 변이가 확인된 국소진행성 또는 전이성 비소세포폐암 1차치료제로 확대 허가를 받으며 사용 범위가 넓어졌다.



국내에서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신약 품목허가를 받은 후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받을 때까지 통상 1년 내외의 기간이 소요된다. 비급여 상태로는 약값만 따져도 터무니없이 비싼 경우가 많아 '그림의 떡'이다. 실제 렉라자와 동일한 기전으로 작용하는 '타그리소'는 비급여로 1년 약값이 7000만 원에 달해 수많은 환자들이 비용 문제로 치료를 포기하고 있다.

◇ 창업정신 살리려 사회환원 약속…"건보 적용 때까지 무상공급"


그런데 유한양행이 이달 초'렉라자'가 1차 치료로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될 때까지 무상 공급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조욱제 유한양행 대표는 이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에 대해 "고(故) 유일한 박사의 창업 정신을 기려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며 “렉라자의 급여 처방이 가능한 시점까지 지원 규모에 제한을 두지 않고 무상으로 약제를 제공하는 동정적사용프로그램(EAP)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막대한 연구개발(R&D) 비용을 투입해 개발한 신약이 건보 적용될 때까지 무제한으로 무상 지원하는 것은 국내외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다.

◇ EAP 등록 2호는 폐암 수술 1년만에 재발한 50대 여성


김씨는 그렇게 유한양행의 렉라자 EAP 1호 환자가 됐다. 김씨에 이어 EAP 2호 환자로 등록된 이모씨(50·여)도 이날 고신대복음병원에서 렉라자 처방을 받았다. 이씨는 1년 전 CT 검사에서 폐결절 소견을 보여 정밀검사를 시행하고 폐선암 1기로 진단되어 수술을 받았던 환자다. 당시 유전자검사를 통해 EGFR 돌연변이가 확인되었는데, 추적검사를 하며 지켜보던 중 대표적 종양표지자인 'CEA(Carcinoembryonic Antigen)' 수치가 조금씩 증가하는 소견을 보였다. 결국 수술을 받은 지 불과 1년만에 시행한 CT 검사에서 양쪽 폐에 전이성 병변이 확인되어 좌절하던 이씨는 장 교수로부터 EAP 등록을 권유 받은 뒤 희망을 되찾았다.

유한양행의 EAP 진행 소식을 접한 폐암 환자와 가족들의 반응은 뜨겁다. 장 교수는 "렉라자와 같은 3세대 약물은 1·2세대 약물보다 무진행생존기간(종양 크기가 더 나빠지지 않은 상태로 생존한 기간)이 약 2배 길고 뇌혈관장벽(BBB) 투과력이 높아 뇌전이의 치료나 예방에 효과적"이라며 "폐암 신약을 무료로 공급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환자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해 새삼 놀라곤 한다"고 말했다. EAP 참여를 거부하는 환자가 없을 정도로 현장에서 체감하는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다.

◇ 국내에서만 3000명 대기…"3세대 폐암약 수요 높아"


EGFR 돌연변이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서 유독 발생률이 높다. 장 교수에 따르면 국내에서 렉라자와 같이 3세대 약물을 1차 치료제로 처방받아야 하는 4기 폐암 환자는 어림잡아도 3000명 가량 된다. 그만큼 3세대 폐암 신약에 대한 갈증도 컸다.

이미 고신대복음병원은 EAP 3호 처방 환자가 대기 중이다. 추적 검사에서 재발 의심 소견을 보여 조직검사를 진행했고, 결과가 나오는대로 렉라자 1차치료 적응증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따져 처방 받게 된다. 장 교수는 EAP 규모가 어느 정도 될 것으로 예측하냐는 질문에 “6개월간 20여 명, 1년이면 대략 50명까지도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AP 대상자는 EGFR 엑손19 결손 또는 엑손21 치환 변이된 국소진행성 또는 전이성 비소세포폐암으로 진단된 환자 중 치료 이력이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주치의의 엄밀한 평가를 거쳐 선정된다. 비소세포폐암 환자를 진료하는 전국 2·3차 의료기관이 참여할 수 있다. 현재 고신대복음병원 외에도 전국 주요 병원들이 EAP 진행을 위한 기관생명윤리위원회(IRB) 승인 절차를 진행 중이다. 고신대복음병원의 경우 15년째 IRB 위원장을 맡고 있는 장 교수가 ‘렉라자’의 적응증 확대 승인 직후 발 빠르게 패스트 트랙 절차를 진행한 덕분에 전국에서 가장 빨리 IRB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렉라자가 6월 말 1차치료제로 승인 받았음을 고려한다면 IRB 승인까지 2주 남짓 걸린 셈이다. 장 교수는 “타그리소가 2018년 1차치료제로 허가를 받고 5년 가까이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다 보니 비용 문제로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들을 수없이 마주해야 했다"며 "4개월가량 비급여 약값을 대다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안되겠다며 포기하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컸다"고 털어놨다. "환자 수가 적지도 않은데, 민간 기업이 수익성을 포기한 채 전폭적인 지원에 나선 데 대해 의사로서 크게 감동했다"고도 말했다.

◇ 미국·일본은 이미 3세대 약물이 80% 점유…"한국도 머지 않았다"


비단 고신대복음병원 뿐 아니라 폐암 환자를 진료하는 다른 병원들도 EAP 진행을 위한 IRB 승인 절차에 속도를 내고 있다. 8월 중에는 서울 등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주요 병원에서 렉라자의 EAP 처방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장 교수에 따르면 이미 미국·일본 등 주요 국가에서는 3세대 약물이 EGFR 돌연변이 양성 비소세포폐암 1차치료제 처방의 80%가량을 차지한다. 렉라자의 무상공급을 시작으로 머지 않아 3세대 약물이 나란히 급여권에 진입하면 국내 역시 처방 판도가 크게 바뀔 것이라고 봤다. 그는 "EAP 참여를 거부하는 환자가 없을 정도로 환자들의 관심이 높다"며 "렉라자의 EAP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3세대 약물이 폐암 1차 치료제로 처방될 수 있는 길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어 고무적이다. 오래 기다린 만큼 국내에서는 더욱 빠르게 폐암 치료제 처방 판도가 뒤바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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