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2년 차 손예빈에겐 ‘나이키의 선택’이라는 수식이 따른다. 글로벌 스포츠용품 업체인 나이키가 KLPGA 투어 선수와 모자부터 신발까지 풀 라인 계약을 하는 건 워낙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계약을 다 세어 봐도 다섯 손가락이 다 채워지지 않는다.
열세 살에 국가 상비군에 뽑히고 프로 데뷔전인 KLPGA 점프(3부) 투어 첫 대회부터 우승하면서 손예빈은 부드럽기만 한 카펫 위를 걸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찍어낸 듯 단조로운 카펫은 아니었다. 시드전에서 제 기량을 보이지 못해 정규 투어 데뷔가 미뤄지기도 했고 정규 투어 데뷔 시즌엔 상금 순위에서 아깝게 60위 안에 들지 못해 시드를 잃을 위기도 겪었다.
손예빈은 고비마다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2021년 정규 투어 시드전을 수석으로 합격했고 이번 시즌 시드가 걸린 시험도 무난하게 통과했다. 그렇게 단단하게 벼려진 손예빈은 자신에게 붙는 수식이 이미 부담이 아니다. 골프장 안팎에서 자신만의 루틴을 묵묵히 지키며 계단 오르기 중이다.
나이키가 손예빈 선수를 콕 찍은 건 어떤 이유일까?>>>
“처음엔 잘 몰랐다. 그 당시에 파워풀한 스윙과 시원시원하고 공격적인 플레이를 눈여겨봐 주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성실한 자세랑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발전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준 게 아닌가 싶다.”
성실함에 대한 얘길 더 들어보고 싶은데.>>>
“국가대표 시절에 성실하단 얘길 자주 들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골프 시작하고부턴 계속 성실했던 것도 같고. 일단 사춘기도 거의 없었다고 할 만큼 제 기준으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그랬다. 물론 엄마 아빠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웃음) 다른 무엇보다 골프에 임하는 자세는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고 진지했다. 가끔 장난도 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레슨 프로님 말씀 잘 듣고.”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다.>>>
“옛날엔 연습량 많은 게 우선이었다. 퍼트가 너무 안 돼서 하루 종일 퍼트 연습만 하던 시기도 있었다. 새벽 3시부터 밤 10시까지. 그때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국가대표 되기 직전에. 스스로한테 화가 나서 오기로 그렇게 했던 기억이 있다. 근데 한 번씩 그렇게 몰아서 하는 것보단 역시 꾸준히 쌓아가는 게 최고인 것 같다.”
나이키가 후원하는 타 종목 선수들과 교류도 있을 텐데.>>>
“후원 받는 여자 선수들이 다 모이는 서밋 행사가 있었다. 쇼트트랙 이유빈, 농구 박지수, 야구 김라경, 축구 지소연, 복싱 최현미 선수 등이 왔었다. 돌아가면서 마이크를 잡고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한국 여자축구 최초로 잉글랜드 무대에 진출한 지소연 선수는 엄청 외롭고 힘든 시간도 있지만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겨내고 있단 말을 했다. 그 말이 참 와닿았다. 저는 골프 선수를 꿈꾸는 후배들을 생각하면서 운동을 했던 건 아니니까.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또 다른 선수와의 기억 남는 만남이 있나.>>>
“최현미 선수가 저한테 질문을 해줬는데 그 질문 자체가 인상 깊고 곰곰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골프랑 복싱이랑 다른 점이 많다. 나는 복싱에서 아직 져본 적이 없는데 골프는 다르지 않으냐’고. 우승이 아니면 사실 지는 거니까 저는 매번 지고 있는 거 아닌가. 거의 1주일에 한 번씩 대회에 나가면서 매번 지는 걸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질문도 받아서 신선한 자극이 됐다.”
골프볼에 그려 넣은 라인이 눈에 띈다.>>>
“한 바퀴 빙 둘러서 다 그린다. 선 중간중간에 작게 하트도 그린다. 빨강 또는 파랑 또는 초록으로. 공 하나에 들어가는 하트는 다 같은 색이어야 한다. 완벽주의 같은 게 있어서 한 라운드에 공은 반드시 두 줄(6개)을 골프백에 넣어서 가야 하고 라인은 전날 그려 넣는다.”
인스타그램에 남긴 글의 의미가 궁금하다. ‘팬 분들이 건네는 꽃은 아름답고 그분들의 손에는 향기가 남는다는 게 참 마음 따뜻한 일인 것 같다’고 썼던데.>>>
“데뷔 시즌 전반기 끝내면서 올린 글이다. 장미를 건넨 사람의 손엔 향기가 남는다는 내용의 중국 속담으로 기억한다. 팬들은 저한테 관심과 응원, 사랑이라는 장미를 건네주신 셈인데 그 덕분에 서로 같이 향기로워지는 거라는 의미를 새기고 싶었다.”
다른 많은 선수들처럼 드라이버 입스를 겪었다.>>>
“사실 점프 투어 우승할 때도 드라이버가 잘 맞진 않았다. 다만 코스가 좀 넓은 편이어서 불안감이 적었던 거지. 시간 지나고 돌아보니까 그때도 안 좋았던 때였던 거다. ‘아, 입스구나’ 이렇게 인지를 하게 되면서 걱정이 확 커졌다. 드림(2부) 투어 시드전 처음 나갔을 때 영광CC에서 쳤는데 코스가 너무 좁더라. 그래서 원래 두 줄 가지고 가던 볼을 세 줄 가지고 갔는데도 하루에 8개나 써버렸다.”
어떻게 극복한 건가.>>>
“작년까지도 드라이버가 되게 힘들게 했으니 3년 간 계속된 건데 극복이라기보단 시간이 해결해준 셈 같다.(웃음) 무려 3년 아닌가. 항상 불안하고 겁이 나서 제대로 스윙하지 못하다가 작년 10월 쯤부터 좋아졌다. 동작을 고친 건 거의 없는데 대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주변 분들이 믿어준 덕분이 크다. 저 자신이 꽤 괜찮은 선수라고 느끼게 되면서 입스도 좀 나아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었는지.>>>
“팬 분들이 작년에 성적이 안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곧 잘 칠 것 같다’ ‘좋은 선수다’라고 늘 얘기해주셨다. 그중에서도 김효주 선배님을 예로 든 어떤 분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효주 선수가 아직 성적을 내기 전의 일인데 스윙이 좋고 좋은 플레이를 할 거란 확신이 있어서 분명히 잘할 거라고 믿었다’면서 ‘예빈 선수를 보면 효주 선수 보던 때와 똑같은 생각이 든다. 항상 응원하겠다’고 했다. 내 골프에 대해서 갈팡질팡하면서 ‘이게 맞나’하던 때였는데 확신을 갖고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입스를 겪은 뒤의 드라이버 샷은 어떤가.>>>
“거리가 더 많이 나간다. 편하게 치면 240야드 나가고 잘 맞으면 250야드쯤 보낸다.”
4월 말 KLPGA 챔피언십 준우승을 통해 얻은 것은?>>>
“자신감. 지난 시즌 시작할 땐 주변 분들 기대가 컸지만 스스로는 자신감이 크지 않은 상태였다. 심리적으로 어딘가 불안감이 있었다고 할까. 올핸 일단 준비도 잘됐고 해서 ‘작년보단 잘 칠 수 있겠지’하는 생각은 있었는데 결과로 나타난 거 같아서 좋았다.”
대학 생활은 어떤가.>>>
“성균관대 스포츠과학 전공 3학년이다. 대회 일정이 없는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주로 학교 가고 가끔은 수요일에도 간다. 스포츠를 경제로 풀어내는 수업이 재밌다. 선수 연봉 책정에 그렇게 다양한 데이터와 분석이 들어가는 줄 미처 몰랐다. 선수의 입장인 나로서는 사측의 관점을 이해하는 기회가 돼서 아주 흥미롭다. 체육 측정 평가라는 작업을 컴퓨터 코딩으로 해내는 수업도 재밌게 들었다. 주로 숫자를 다루는 쪽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휴일인 월요일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은?>>>
“레슨 받고 운동하고 학교 다녀오면 하루 다 간다. 밤에 일찍 잠들면 베스트다. 쉬는 게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가만히 있으면서 휴식하려 한다.”
내게 힘을 주는 음악은?>>>
“신나는 거. 아이브의 ‘I AM’을 가장 즐겨 듣는다. 대회 기간 라운드 시작 전에 이어폰 낀 채로 밥 먹고 준비하고 연습 그린 가서도 안 빼고 그냥 할 때도 있다.”
골프 다음으로 자신 있는 운동은?>>>
“자신 있는 건 아니지만 당구, 볼링 정도 할 줄 안다. 당구는 4구만 칠 줄 안다. 러닝도 좋아하는 편이다. 빠르게 뛰었다가 천천히 가고 다시 빠르게 달리는 인터벌 러닝을 주로 한다.”
골프 다음으로 좋아하는 건?>>>
“노래 부르기 좋아한다. 블루투스 마이크 사서 집에서 부른다. 장르 안 가리고 다양하게 부르는데 트로트 부르면 할머니가 정말 좋아해주신다. 장윤정의 ‘초혼’ 자주 부르고 아빠랑 할머니는 안예은의 ‘상사화’ 부를 때 가장 크게 호응하신다. 가족끼리 차로 어딘가 놀러 가면 자연스럽게 주문이 들어온다. ‘예빈아, 노래 한 곡!’”
골프를 처음 배웠던 날 기억나는지.>>>
“어느 스포츠센터였다. ‘닭장’이라고 부르는 전형적인 연습 시설 있지 않나. 타석 2m 앞에 작은 망이 쳐진. 거기서 엄마랑 찜질방용 복장 비슷하게 맞춰 입고 같이 레슨 받았다.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돌아보면 그렇게 재밌었던 기억은 아닌데 엄마에 따르면 골프채를 뺏어 가면 더 치겠다고 막 울고 그랬단다.”
국가대표 시절은 어땠나.>>>
“동료들이랑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잘 때까지 계속 함께였으니 정말 많은 걸 공유했다. 홍정민, 김재희, 서어진, 이예원, 윤이나랑 같이 대표 생활했다.”
별명은?>>>
“‘발예빈’. 별 이유는 없고 성이 손이라서 손 대신 발을 붙인. 그리고 ‘예콩이’라고도 불린다.”
휴대폰에서 가장 자주 쓰는 앱은?>>>
“쇼핑몰 앱 같은 패션 관련 앱에 자주 들어간다. 패션에 관심이 좀 있다. 요즘 어떤 패션이 유행이고 이 상의엔 어떤 하의가 어울리는지, 내가 가진 아이템에 뭐가 어울리는지 그런 거 알아보려고 들어간다. 그런 걸 ‘룩북’이라고 하던데 유튜브도 그런 쪽으로 본다. 누군가 내가 가진 아이템이랑 비슷한 걸 입는 거 보면 어떤 식으로 맞춰 입는 게 좋을지 느낌 오니까.”
원래 디자인 쪽에 관심이 많나.>>>
“그런 편이다. 엄마가 대학에서 디자인 전공했고 사촌 언니도 디자인 쪽이다. 아빠는 용인대에서 유도했고 작은 아빠는 럭비했다고 들었다.”
들으면 놀랄 만한 나만의 취향은?>>>
“먹는 거에 있어서 사람들이 좀 놀라긴 한다. 무조건 집밥을 먹으려 하고 저염식으로 먹는다. 간이 센 게 싫다. 제가 먹는 걸 먹어보면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느냐고 한다. 국밥이나 콩국수에 따로 소금 절대 안 넣는다. 튀김류나 과자도 거의 안 먹는다. 이런 식으로 식습관이 들다 보니 수면의 질도 좋아지고 몸에 되게 좋더라. 아침에 일어날 때도 확실히 개운하고. 탄산음료는 원래 싫어해서 안 먹고 물도 냉수는 피하고 정수만 마신다. 컨디션 관리 차원도 있다. 아무래도 성적 내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
‘맵부심’(매운 음식 잘 먹는 자부심) 이런 건 전혀 없겠다.>>>
“원래는 매운 음식 잘 먹는 편이었는데 자극적인 걸 딱 피한 뒤로는 아예 못 먹게 됐다. 예전엔 ‘엽기떡볶이’ 울면서 즐겨 먹었다. 지금은 ‘신라면’도 잘 못 먹는다.”
식사 외에 지키는 생활 습관이 또 있나.>>>
“하루 수면 시간 8시간 지키려고 노력한다. 매일 8시간씩 자면 깨어있을 때 피곤함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중요한 건 자기 전에 편안한 마음 상태를 만드는 거다. 대회 때 이른 아침 시작하는 조에 편성되면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전날 저녁 7시엔 자야 한다. 이럴 땐 저녁 6시부터 스트레칭하고, 명상도 하고, 책 읽고, 일기 쓰면서 적극적으로 잠을 청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현재와 예상하는 나의 미래는?>>>
“현재는 노력하는 중. 이제 시작이니까. 큰 선수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것들을 하나씩 갖춰가고 있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미래엔 큰 선수가 돼야 할 것이다. 투어를 오래 뛰면서 오랜 기간 꾸준한 성적을 내면 그게 큰 선수라고 본다. 한순간에 스포트라이트를 확 받아서 화려해졌다가 내려가는 편보다는 오래 가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이다. 남들 기준엔 모자란다 할지라도 내 기준을 충족시키면서 쭉 가는 그런 선수가 되는 게 목표다.”
지금의 손예빈한테 보태고 싶은 거랑 덜어내고 싶은 것은?>>>
“온전히 저를 위한 시간을 보태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덜어내야 할 것이다. 원래 친척들이랑 놀러 다니고 함께 시간 보내는 걸 좋아했었는데 요즘엔 그러지 못해 아쉽다.”
올해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우승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간절해지는 것 같다. 우승하는 순간을 상상도 해본다. 우승하고 나서 어쩌면 커질 주변의 관심과 기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일단 우승을 하는 게 먼저인데 해보지도 않고 걱정부터 하니 참 쓸데없단 생각도 든다.”
PROFILE
출생: 2002년 | 정규 투어 데뷔: 2022년 | 소속: 나이키
주요 경력:
2023년 KLPGA 챔피언십 2위, 에버콜라겐·더시에나 퀸즈크라운 4위, NH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 5위
2021년 KLPGA 투어 시드전 예선·본선 1위
2020년 KLPGA 점프 투어 1차전 우승
2019년 국가대표, KB금융그룹배 아마추어선수권·전국체전 단체전 우승
2018년 어코드 중국 아마추어오픈 2위와 19타 차 우승
[서울경제 골프먼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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