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여명]'무량판'은 죄가 없다

이혜진 건설부동산부장

공기 단축·수익에 열올리는 공사장

신공법·이권 카르텔 대책 쏟아내도

새로운 '철근 빠진 아파트' 나올것

'빨리, 싸게' 대신 '안전 건설' 절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워낙 슈퍼 발주처다 보니 일감 좀 따보려고 영업 확대를 검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끝내 LH 일을 하나도 못 했습니다. ‘LH 전관’이 있어야 수주가 된다고 직원들이 건의했지만 도저히 뽑을 수가 없더군요.”

한 감리 업체의 전직 사장 얘기다. 전관에게는 못해도 연봉 2억 원에 운전기사와 사무실을 내줘야 하는데 그 돈을 쓰려면 실무 직원들의 인건비를 깎아야 하기에 결국 일감을 포기했다는 설명이다.

‘철근 빠진 아파트’로 드러난 부실 공사 실태와 관련해 LH에 대한 성토가 쏟아지고 있다. 연간 발주액만 10조 원이 넘는 초대형 발주처가 기본적으로 필요한 전문성은커녕 청렴성마저 갖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특히 ‘엘피아(LH+마피아)’로 축약되는 전관 업체 밀어주기 관행은 촘촘한 이권 카르텔을 형성하며 공사 품질 저하 및 안전 문제의 원흉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건설 업계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도 같은 얘기를 했다. “대형사들은 웬만하면 LH 공사 안 들어갑니다. 공사비는 박한데 요구 사항이 너무 많죠. 심지어 현장소장도 연관된 사람으로 앉히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다 보니 관급 공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중소형 건설 업체들이 주로 입찰에 들어간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인천 검단 LH아파트의 지하 주차장 붕괴에서 시작된 부실 공사 문제는 이제 건설 업계 전체의 신뢰 붕괴 사태로 번져가고 있다. 결국 국토교통부 장관, 대통령, 당정까지 나서서 같은 무량판 공법이 적용된 민간·공공 아파트의 전수조사와 대책 마련을 지시하고 LH는 부랴부랴 고강도 대책을 쏟아냈다. 그런데 LH만 정신 차리면 국내 건설 안전 문제는 해결될까.

건설 업계의 베테랑들은 그렇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설계. 설계도 하청·재하청의 구조로 이뤄지는데 그 과정에서 하자 있는 설계도가 그려져도 이를 잡아내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설계사의 전문성에 투자하기보다 수주 인맥에 돈을 쓰다 보니 벌어지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시공. 설계도를 읽을 줄 아는 현장소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탄식이 나온다. 요즘 아파트 현장소장의 최대 미션은 빨리, 싸게 짓는 일이다. 공사비가 수천억 원에 달하는 아파트 현장에 본사 인력 몇몇을 배정해주고 현장소장에게 알아서 아웃소싱(하도급)을 통해 ‘수익성 높게’ 지으라고 하는 게 요즘 건설사들의 일하는 방식이다. 당연히 현장소장은 공기 단축, 자재비 절감에 열을 올리고 이는 부실 공사로 이어진다. 한 대학의 건축과 교수는 “공기를 단축하면 상을 줄 일이 아니라 매를 쳐야 한다”고 일갈한다. 종합 건설사들이 수익을 위해 직영을 대폭 줄이고 수백 건의 하청·재하청의 계약을 통해 건물을 짓는 상황에서 컨트롤타워인 현장소장이 기술 전문성보다 경영 능력으로 평가받으니 안전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감리. 설계대로 시공됐는지를 확인할 최후의 보루인 감리에 대한 투자 역시 박하다. 인허가권자의 지정감리제가 도입돼 있으나 효율을 중시하는 공사 현장에서 제 역할을 하기는 힘들다.

이렇게 모든 단계에서 부실의 위험이 잠재한 가운데 무량판 구조라는 신공법은 건설 안전의 약한 고리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정부는 무량판 구조에 대한 종합 안전 대책과 건설 이권 카르텔 혁파 방안을 내놓기로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LH는 전관 업체에 불이익을 주고 무량판 아파트를 짓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카르텔이나 신공법만으로 이번 사태의 원인을 몰아가서는 수년 후 새로운 종류의 부실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특히 이번 사태를 정쟁화하려는 정부와 여당의 태도는 우려스럽다. 전 정부 탓으로 몰아 부실이 해결된다면 백번이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사건의 본질은 뒤로한 채 정치 싸움으로 끌고가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기 어렵다. 전문가들이 강조하듯 무량판 공법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퇴행하는 건설 산업의 안전 관리 능력을 제고할 정책이 절실하다.

‘빨리빨리’ 정책보다 공기가 좀 지연되더라도 견고하게 정책을 설계하고 시행하고 점검해야 한다. 날림 공사가 아니라 안전 공사를 해야 하는 것은 정책도 마찬가지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