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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소리, 세상을 깨우다 [작가의 아틀리에]

■소리 아티스트 권병준 작가 작업실

작업에 집중 위해 매일 오전 2~4시 출근

소리와 기술 결합한 뉴미디어 작품 제작

계속 걷고 절하는 로봇으로 이방인 구현

특수제작 헤드셋 통해 다양한 소리 전달

배타적인 인간 사회에 날카로운 울림 줘

‘2023 올해의 작가상’ 수상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허름한 빌딩. 이 빌딩 1층에는 문구점이, 2층엔 간판도 없는 사무실이 있다. 흰색 사무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서면 생각보다 넓은 방이 드러난다. 잘 정리되지 않은 방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전자기기와 마구 얽혀 있는 전깃줄, 3차원(3D) 프린트, 그리고 로봇처럼 생긴 사다리들이 놓여 있다. 이곳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2023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 권병준이 매일 새벽 3시에 출근하는 작업실이다.

[작가의 아틀리에]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작가 권병준을 만났다. 사진=서지혜 기자




[작가의 아틀리에]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작가 권병준을 만났다. 사진=서지혜 기자


매일 600m 걷는 ‘사다리 로봇’의 공연…미술관에 펼쳐진 로봇 마을


권병준은 입체음향이 적용된 소리 기록과 전시 공간에서의 재현 및 기술 개발에 관심을 두고 음악·연극·미술을 아우르는 뉴미디어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작가다. 이번 2023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 작가는 인간 사회의 소수자이자 동반자로서 ‘로봇’을 선택하고 신작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로봇’ ‘오체투지 사다리봇’ ‘부채춤을 추는 나엘’ ‘장승’ 등 일련의 로봇 퍼포먼스를 포함한 종합극을 선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올해 일부 제도를 개선해 후보 작가의 신작과 구작을 함께 전시하고 관람객이 참여하는 공개 좌담회를 거쳐 최종 수상자를 뽑았는데 권병준이 최종 선정됐다. 심사위원단은 권병준의 작업이 기술을 통해 인간성에 질문을 던지고 이를 통해 사람들 간 이해에 관한 날카로운 울림을 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시는 전시 공간을 총 4구역으로 나눠 로봇의 움직임을 ‘공연’처럼 보여준다. 권병준은 “전시를 기획하며 김홍도의 그림을 떠올렸다”며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을 사는 그림처럼 로봇들이 걷고 춤추고 격렬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권병준의 작품들. 사진=서지혜 기자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권병준의 작품들. 사진=서지혜 기자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라 하기에 로봇의 움직임은 기이하다. 다리는 사다리로 만들어져 있고 손전등·거울 등이 얼굴 역할을 한다. 관객들은 작가가 특수 제작한 헤드셋을 착용하고 사전에 제공된 맵(지도)에 따라 움직인다. 헤드셋은 벽과 천장에 부착된 수신기와 교신하며 관객들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각 구역으로 이동할 때마다 해당 장소에 맞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어떤 로봇은 걷고 절하는 일을 반복한다. 이 로봇이 걷는 거리가 매일 600m에 이른다. 작가는 “로봇은 전시가 끝날 때까지 총 100㎞ 정도를 움직일 것 같다”며 “일종의 고행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벽 2~4시 출근…새벽부터 만들어지는 ‘이방인의 소리’


왜 로봇에게 고행을 시키는 걸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작가의 작업 루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매일 오전 2~4시 사이에 이곳 작업실로 출근한다. 일반인의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사실상 밤에 출근하는 셈이다. 작가는 “아주 오래전 네덜란드 유학 시절부터 새벽에 일하는 습관을 들였다”며 “매일 새벽 2~4시에 일어나야 혼자서 7~8시간 정도의 시간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작업에서 무척 중요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아틀리에]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작가 권병준을 만났다. 사진=서지혜 기자




혼자 있는 시간에 주로 하는 일은 ‘소리 개발’이다. 그의 커리어를 관통하는 한 가지 매체를 꼽는다면 그것은 ‘소리’다. 사실 권병준은 1990년대 서울대 출신의 록스타로 이름을 날렸다. 40대 이상의 사람들 중에는 ‘삐삐롱스타킹의 멤버 고구마’라고 말하면 ‘아하!’하며 무릎을 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니아가 아니라면 그를 ‘공영방송에서 욕을 해 방송 사고를 낸 사람’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 그가 미술관이 진행하는 ‘올해의 작가상’에 뽑혔다. 뮤지션에서 작가로 정체성이 바뀌었나 싶지만 그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소리를 매개로 일하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2005년 네덜란드 유학에서 소리를 배우고 2008년부터 사운드 엔지니어로 오랜 시간 활동했다. 그러다 소리와 기술을 결합한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미디어 아티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특히 6년 전 직접 제작한 헤드셋을 작품에 활용하면서 더욱 주목받는다. 그가 만드는 헤드셋은 이용자의 동선에 따라 각각 다른 소리가 나오도록 하는 특수한 기능을 갖고 있다. 관객으로 하여금 남산 한옥마을, 충청남도의 저수지 등 다양한 장소를 헤드셋을 착용하고 거닐게 하고 해당 장소에 특화한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 헤드셋에는 마치 위성항법장치(GPS)와 같은 장치를 설치했는데 이 장치가 사용자의 위치를 파악한다. 작가는 “6년 전쯤 미디어 아트 그룹전에 참가했는데 여러 작품의 소리가 섞여 관객이 제가 제작한 소리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고민한 결과 이 같은 헤드셋을 제작했다”며 “다만 장비는 도구일 뿐이고 장비가 전하는 소리를 통해 각 공연(그는 자신이 작품을 구현하는 전시를 공연이라고 표현했다)마다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듣는 일은 보는 일에 비해 더 많은 집중을 필요로 한다. 권병준이 남들이 자는 새벽에 출근해 작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지금의 시대는 눈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사회이며 사람들은 보는 동시에 그것을 욕망한다”면서 “소리는 밖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안으로 향하는 것이며 눈을 감고 집중해야 그 메시지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다”고 했다.

“로봇도 결국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는 이방인이 될 거예요.”


‘소리’가 권병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유일한 매체라면 ‘이방인’은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단 한 가지 주제다. 그가 수집한 대부분의 소리는 이방인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귀결된다. 그는 충청남도 홍성에서 다문화가정의 자장가를 채록하거나 외딴섬 교동도에서 들린 대남방송을 녹음해 그 소리를 작품에 녹여낸다. 그런 것들을 기록해 한 시대와 세상을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작품의 공통된 맥락이다.

직접 작업 중인 로봇을 소개하는 권병준 작가. 사진=서지혜 기자


작업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18년부터다. 작가는 2018년 이방인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당시 한국에는 500여 명의 예멘 난민이 입국한 문제로 큰 갈등이 빚어졌는데 작가는 그때의 모습을 갈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당시 온 나라가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하나가 되어 예멘 난민을 비난하고 배척했다”며 “그 모습을 보며 한국이 아직도 매우 닫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목소리를 녹음해 들려주는 나의 작업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자괴감에 빠졌다”고 했다.

그런 고뇌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로봇들’이다. 작가는 “낯선 이들에게 철저하게 배타적인 사람들의 심리적 경계를 알고 싶었고, 낯선 인간보다 더 낯선 존재인 로봇을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제작하기로 했다”며 “낯선 존재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면 사람들의 속마음이 여과 없이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종종 ‘로봇을 키운다’고 표현했다. 마치 육아를 하는 부모의 마음을 보는 듯하다. 작가라면 무릇 작품을 판매해 얻은 수익으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할 텐데 그렇게 귀하게 키운 로봇을 누군가에게 내줄 수 있을까. 작가의 대답은 역시나 범상치 않다. 그는 “작품을 판매할 생각은 당연히 있지만 거기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며 “누군가가 로봇을 산다면 감사히 팔 용의가 있지만 저 역시 컬렉터를 고르고 싶다”고 했다. 컬렉터를 고른다니, 어떤 의미인지 묻자 그는 “이렇게 정붙인 제 작업을 가져갈 분께는 설계도도 함께 드릴 의향이 있다”며 “대신 그분이 스스로 작품을 고칠 용의도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미디어아트 작품은 고장나는 게 숙명이다. 작가는 “컬렉터가 재미있어하며 스스로 작품을 고칠 의향이 있다면 기꺼이 그 사람에게 작품을 팔겠다”고 말했다. 작가는 아마도 사람과 사는 것처럼 컬렉터가 로봇과 살아가기를 바라는 듯했다.

권병준이 그리는 좋은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기계에 대한 애착이 앞으로 더 많아질 텐데 이런 낯선 존재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며 “결국은 어떤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가를 고민하면서 제 작업을 감상하면 새로운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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