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이 장기 침체의 상징과도 같던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해제하면서 관심은 일본 정부가 언제 디플레이션 탈출을 선언할지에 모아지고 있다. 올가을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 침체에 빠진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경기 부양 성과를 내세우며 반전을 꾀힐 것이라는 전망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경제 상황이 나아졌다고 볼 수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20일 복수의 일본 매체에 따르면 스즈키 슌이치 재무상은 전날 일본은행의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 변경에 대해 “이번 변경으로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했다고 할 수는 없다”며 “여러 지표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현 상황을 디플레이션보다는 인플레이션에 가깝다고 보고 있지만 디플레이션에서 완전히 탈출했다는 판단에는 선을 긋고 있다. 일본 정부의 ‘디플레이션 탈출’은 ‘다시 디플레이션 상태로 돌아갈 전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를 평가하는 지표로는 △물가 상승률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 △단위노동비용(기업이 재화·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임금) △일본 경제의 수요와 공급 차이를 나타내는 수급 갭(gap) 등이 활용된다.
GDP 디플레이터는 명목 GDP를 실질 GDP로 나눈 값으로, 통상 그 나라 국민경제의 물가 수준을 나타낸다. 물가와 GDP 디플레이터는 전년을 웃도는 플러스권에서 움직이는 반면 경제 전체의 공급과 수요의 차이를 나타내는 수급 갭은 지난해 말까지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만성 수요 부족 상태를 이어갔다. 수급 갭이 마이너스이면 물가가 하방 압력을 받는다. 최근 노사 임금협상에서 기업들이 큰 폭의 인상에 나서고 있지만 실질임금 상승률은 22개월 연속 하락해 마냥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특히 물가와 임금의 경우 정부와 일본은행의 강력한 경기 부양에 힘입어 수치를 끌어올린 측면이 있는 만큼 지금의 선순환이 얼마나 지속될지가 관건이다.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기시다 총리에게 시간이 많지는 않다. 9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역대 최저인 내각·당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파벌 해산으로 혼란한 당에서 구심력을 회복해야 한다. 당장 6월 23일로 이번 국회 회기가 끝나지만 중의원 해산을 통해 구심점을 강화하기에는 ‘제대로 된 한 방’이 부족하다. ‘탈(타脫)디플레이션 선언’ 같은 매력적인 카드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이달 초부터 일본 언론들은 정부가 2001년 디플레이션 진입을 인정한 후 23년 만에 ‘탈출’을 공식 선언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기업 실적과 증시의 ‘역대 최고 기록’ 경신이 이어지면서 지지율 하락, 자민당 정치자금 스캔들 등 궁지에 몰린 기시다 정권이 국면 전환용으로 ‘디플레이션 탈출’을 꺼내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경제지표의 온기가 체감경기와 지지율로 스며들지 않은 데다 정부 내에서도 “잘못하면 금융정책 정상화는 바로 탈선한다” “다시 디플레이션으로 돌아가면 돌이킬 수 없다” 등의 신중론이 확산하면서 시기를 저울질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기시다 총리는 전날 일본은행의 발표 직후 ‘디플레이션 탈출 선언’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물가 기조나 배경을 종합적으로 판단해나가겠다”며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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