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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 탈은 바뀌었지만…'중국인 배척' 진행형이다

■중국인 문제 (메이 나이 지음, 책과함께 펴냄)

美 골드러시發 중국인 대거 이주

금광산 노동자 4명 중 1명 달해

위협 느낀 백인들, 노골적 차별

결국 수십년간 이민중단법 시행

美 사회가 갖는 '황화 공포' 여전

현재는 중국계 학생들 등 타깃돼

1910년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주민들이 배에서 내려 처음 입국하던 장소가 됐던 앤젤 아일랜드 전경 /샌프란시스코=정혜진 기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인 피어39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악명 높은 감옥으로 꼽혔던 앨커트래즈 섬이 시야에 들어온다. 많은 이들이 이 섬의 비극적인 역사에 대해 잘 알지만 그 뒤편에 위치한 버려진 섬 앤젤 아일랜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곳은 1910년부터 샌프란시스코의 입국 심사소이자 수용소 역할을 했다. 이곳을 거쳤던 상당수는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이다. 일부 한국인들도 이곳 관문을 통과했다. 수십일 간의 항해를 거쳐 거센 바람으로 배가 정박하기도 힘든 곳에 도착해 들고 온 서류 몇 장을 부적처럼 간직한 채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던 이들을 맞이한 건 최대 1년 반에 달하는 강도 높은 심사를 빙자한 수용 생활이었다. 한동안 앤젤 아일랜드는 이민자 배제의 상징이었다.

1910년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 앤젤 아일랜드에서 이주민들이 배에서 내린 뒤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생활했던 수용소가 보존돼 있다. /샌프란시스코=정혜진 기자


앤젤 아일랜드 입국심사소에 대한 설명. 중국인 배제법으로 인한 배제 기능 등이 언급돼 있다. /샌프란시스코=정혜진 기자


1882년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부임한 중국의 학자이자 외교관 황쭌셴이 4년 내내 맡은 일은 입국과 동시에 추방되는 중국인들을 구명하는 일이었다. 귀국하며 그는 좌절감을 시로 남겼다. ‘전 지구의 절반을 움켜쥐고 /미국 독수리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있다/ 중국인들이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 중국인들을 위해 조금만 공간을 남겨둘 수는 없는가’

신간 ‘중국인 문제’는 ‘19세기 골드러시, 이주와 노동의 배제’를 주제로 미국과 호주 등 국가에서 골드러시 이후 벌어진 중국인과 백인의 접촉, 백인 사회의 중국인들을 향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를 추적한다. 중국계 미국인인 저자 메이 나이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과 교수는 백인 사회에 줄기차게 자리한 공포를 ‘황화(아시아 황색 인종의 부상으로 미국·유럽 등 백인에게 미치게 되는 침해나 압력을 일컫는 인종주의적 은유)’로 설명한다.



처음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미국 땅으로 건너온 시기는 1849년 10월로 기록돼 있다. 당시 1849년 1월 홍콩 신문인 ‘프렌드 오브 차이나’를 통해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고 6000여명이 400만 달러 상당의 금을 채취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들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이들이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으로 옮겨가면서 연쇄 이주가 시작됐다.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빠르게 늘었다. 1850년대 후반이 되면 중국인은 전체 캘리포니아 인구의 10%를 차지했고 광산 노동자 4명 중 1명에 달했다. 호주에서도 1854년 2000명이던 중국인은 5년 만에 4만2000명으로 늘었다. 당시 호주 전체 인구가 40만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큰 규모다.

같은 금광에서 일을 했던 백인 광부들은 점차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공포심에 편승한 건 정치인들이었다. 당시 재선을 노렸던 캘리포니아 주지사 존 비글러는 광산 노동자들을 공략했다. 곧 중국인이 10만명까지 늘어날 것이고 백인들의 삶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다음해 재선에 성공한 그는 중국인 문제에 편승해 선출직이 된 최초의 정치인이 됐다. 캘리포니아의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꼽히는 타호호(Lake Tahoe)는 한때 그의 이름을 따 비글러호로 불렸을 정도로 그의 구호는 인기를 얻었다. 정부의 공식 보고서에서도 중국인의 빠른 증가세는 ‘게걸스러운 메뚜기 떼’로 비유됐다.

/사진 제공=책과함께


중국인들은 이 같은 공포에 대해 조직적으로 대처했다. 일찍이 광산 일을 벗어나 상업 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위안성, 통 K. 아칭 등 저명한 인사들은 미국 사회와의 네트워크는 물론 중국인 내부의 결속력을 중시했다. 중국인 협회인 양허회관을 창립해 정보를 교류하는 한편 서로의 신용을 쌓아주고 분쟁을 해결하는 한편 법률 지원까지 자처했다. 동시에 부동산, 사업 등에 200만 달러 이상 투자해 미국 내 정착 의지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중국인들은 영국 식민지 대규모 농장(플랜테이션) 노동을 위해 이주한 ‘쿨리무역’에 빗대어졌다. 남북전쟁 후 경제 침체까지 겪자 1882년에는 중국 노동자의 미국 이민을 중단하는 법률이 통과됐다. 저자는 이를 두고 특정 집단이 인종적으로 현지 사회에 동화될 수 없다는 주장에 근거해 특정 집단을 배제한 최초의 이민법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중국이 동맹국이 된 후에야 이 법안은 철폐됐다. 그때까지 많은 이들이 ‘서류상 딸, 아들’로 입국해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살아남았다.

오늘날은 어떨까. 저자의 시각에서 중국인 배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늘날의 ‘쿨리’는 중국의 수출 지역 노동자들과 미국 대학의 중국인, 중국계 미국인 학생들로 달라졌을 뿐 백인 사회가 갖는 공포는 변함이 없다는 지적이다. 중국이 건재하는 한 지정학적 갈등으로 탈을 바꾼 중국인 배제 움직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다. 4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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