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의 이행을 감시하는 전문가 패널이 러시아의 거부권(비토) 행사로 임기 연장이 불발되며 북중러 밀착이 한층 더 강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전문가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과정에서 북한과 러시아의 밀월 관계가 깊어지며 한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연합체가 탄생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북한이 냉전시대에도 겪어본 적이 없는 경제적, 전략적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전환점에 섰다고 볼 수도 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빅터 차 한국 석좌와 엘런 김 선임 연구원은 29일(현지시간) CSIS 홈페이지에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는 유엔 대북 제재 체제를 약화하려는 조직적인 노력의 세 번째 단계”라고 설명했다.
차 석좌 등은 “러시아는 그동안 10건의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에 동의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북 제재 체제를 지지해 왔다”며 “이제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제재를 준수하지 않고 있고, 북한의 탄도 미사일 실험에 대응하는 새로운 안보리 결의를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 거부권 행사로 대북제재위의 권한을 종료하고 기존 제재 체제의 ‘일몰 조항’을 요구함으로써 대북 제재 체제를 영구적으로 해체하기 위한 새로운 조치에 착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차 석좌 등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북한 지원으로 인해 러시아가 북한과의 전략적 협력 관계를 더욱 심화하고 있다”며 “러시아가 북한의 지원 대가로 위성, 핵잠수함, 장거리 탄도 미사일과 관련한 민감한 군사 기술을 제공해 비확산 규범을 포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또 “북한의 (탄약) 재고를 회복하고, 러시아에 더 많은 탄약을 공급하기 위해 새로운 탄약에 대한 공동 생산 협정을 맺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푸틴(러시아 대통령)으로선 미국의 대우크라이나 추가 군사지원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시기에, 북러 간 호혜적 협력을 지속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있어 결정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안보리에서 북한을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전문가 패널이 없으면 유엔 회원국 입장에서는 현재의 제재 체제에 생긴 구멍을 메우고 이행을 감시할 제3자 기구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 역시 같은 날 패널 활동 종료가 지난 2년간 전세계 핵확산 억제 노력이 급속히 악화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진단했다. 과거 러시아와 중국은 북한의 핵·미사일을 국제 비확산 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보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미국과 함께 제재에 동참했는데, 이 대열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국무부에서 비확산·군축 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아인혼 브루킹스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러시아의 거부로 패널의 임기가 종료되는 것을 두고 ‘괄목할 전환’이라고 말했다. 아인혼 연구원은 “냉전 이후 대부분 기간, 러시아와 미국, 중국은 특히 북한과 이란 등 핵확산 도전을 다루는 협력국이었다”며 “그들은 (버락 오바마 미 정부 시절) 이란과의 협상 기간 전적으로 미국과 유럽 편에 섰고, 2016∼2017년 ‘화염과 분노’(도널드 트럼프 전 정부 초기) 기간에도 북한 문제에 도움을 줬다”고 설명했다.
이제 러시아는 이제 북한의 제재 회피를 노골적으로 돕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2022년 5월부터 거부권을 행사하는 차원을 넘어 제재를 위한 감시망까지 허물었다.
러시아는 동시에 북한과는 부쩍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9월 북러 정상회담 이후 러시아는 탄약과 미사일 등 무기를 북한에서 받는 대가로 북한에 인공위성 등 우주 관련 첨단 기술을 이전할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우크라이나와 2년 이상 전쟁 중인 러시아로서는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무기가 필요한 상황이다. 향후 북한과 추가로 무기를 거래할 때 방해받지 않기 위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십수년간 국제사회가 축적한 틀을 무너뜨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패널은 최근 보고서에서 북러 밀착의 생생한 증거를 제공했다. 러시아가 구축해가는 북한과 새로운 관계를 고려할 때 북한으로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패널이 지난 20일 공개한 정례 보고서에는 북한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전에 쓸 무기를 보냄에 따라 얻는 엄청난 반대급부의 정황이 담겼다. 러시아 선박은 지난해 컨테이너를 싣고 북한항과 블라디보스토크에 꾸준히 오갔다.
NYT는 패널이 북러 간 선박 석유 운송에 대한 위성 이미지를 제작, 우크라이나 전쟁이 북한에 어떻게 ‘노다지’(bonanza)가 터졌는지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어떤 방식으로 북한에 연료를 비롯한 물자가 계속 넘쳐흐르도록 하는지 생생한 증거를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패널은 대북 제재 위반이 의심되는 각종 상황을 독립적으로 조사해 이를 공개하고, 안보리나 유엔 회원국에 제재 이행 관련 권고 역할을 해왔다. 패널 활동 종료는 제재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으로서는 제재 위반의 숨통을 트게 되는 셈이다.
대북제재의 구멍으로 여겨지는 중국과 러시아와의 거래를 막을 압박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NYT는 러시아의 대북제재 감시망 해체는 대북 압박 완화에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선 그동안 공들여온 러시아와의 관계가 성과를 보게 된 것으로, 제재 위반은 더 노골화되고 북러 교역이 증가하는 등 관계 밀착은 가속화할 것이라는 얘기다.
한편 우리 정부는 안보리 전문가패널의 임기 연장 결의안이 부결된 데 유감을 표했다. 또 거부권을 행사한 러시아를 향해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외교부는 대변인 명의 성명을 내고 “유엔의 대북제재 이행 모니터링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야 할 시점에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안보리 이사국의 총의에 역행하면서 스스로 옹호해 온 유엔의 제재 레짐과 안보리에 대한 국제사회 신뢰를 크게 훼손시키는 무책임한 행동을 택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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