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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상실, 하늘과 땅의 빛깔로 승화시키다

■RM이 찜한 단색화 대가 윤형근…미공개작 27점 전시

전쟁때 옥살이·반공주의자로 낙인

파리서 면·천 벗어나 한지 첫 실험

色 배제하며 오묘한 검은 빛 담아

PKM갤러리서 3년 만에 회고전

“내 그림 명제를 천지문이라 해 본다. 블루(BLUE)는 하늘이요, 엄버(UMBER, 암갈색 천연 안료)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라고 했고, 구도는 문이다.”( 1977년 1월 윤형근의 기록 57쪽)

단색화의 대가 故 윤형근(1928~2007)은 국내에서 경매가가 가장 높은 작고 작가 중 한 명이다. 미술품 컬렉터로 유명한 방탄소년단의 멤버 RM이 자신의 앨범 자켓에 활용할 정도로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많은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의 생전 삶은 지금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1970년대에는 부정입학 비리를 따져 묻다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수많은 분노와 상실을 겪으며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색을 지운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작가의 대표작 ‘천지문’이 탄생한 배경이다.

‘윤형근/파리/윤형근’ 전시 전경. 사진=서지혜 기자




윤형근이 파리에 머물던 1980년대 제작된 ‘천지문’ 회화 미공개 작품 27점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개막했다. ‘윤형근/파리/윤형근’이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는 2021년 같은 갤러리가 진행한 ‘윤형근의 기록’ 이후 국내에서 3년 만에 열리는 회고전이다. 1980년대 파리 체류 당시 몰두한 한지 작업과 그 전후 시점의 회화, 2002년 파리 장 브롤리 갤러리(Galerie Jean Brolly)개인전에 출품한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윤형근의 ‘번트 엄버와 울트라마린(1981년)’. 사진 제공=PKM 갤러리


작가는 가슴 가득 분노를 안고 1980년 12월 파리로 떠난다. 자유로운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자신이 탐구해 온 천지문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파리 시기 이전 천지문의 재료는 가공하지 않은 면과 마포 등 천이었다. 청색과 암갈색을 섞으면 검정보다 오묘한 은은한 색이 나타난다. 작가는 이 색을 천에 얹어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며칠이고 긋고 또 긋는 수행과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파리에서 작가는 천 대신 한국 고유의 재료인 한지를 활용해 새로운 작업 세계를 구축한다. 작가는 자신의 기록에서 “한지는 기계가 아닌 손으로 만들어지는 데에서 오는 따뜻한 느낌과 소박함이 그대로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진다…가장자리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선은 기계 제품의 양지(洋紙)에 비길 바가 아니다"라고 기록한다.

윤형근의 한지 작품. 사진=서지혜기자




이 시기에 제작된 한지 작품은 PKM 갤러리 1층에서 만나볼 수 있다. 관람객은 한지에 스며든 오묘한 검은 빛깔을 통해 ‘천지문 회화’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작가는 2002년 장 브롤리 갤러리 개인전을 위해 두 번째로 파리에 머문다. 갤러리 대표 장 브롤리가 작가에게 파리의 레지던스를 제공한 덕분에 3개월간 파리에서 지내며 대형 회화를 제작한 것. 이 시기에 작가는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가인 도널드 저드 등과 교류를 가지며 자신의 회화 세계에 확신을 더한다. 이 시기의 작품은 1차 파리 시기에 제작된 작품보다 큰 형태다.

윤형근의 ‘번트 엄버와 울트라마린(2001년)’. 사진 제공=PKM 갤러리


윤형근의 후기 파리 시대 작품. 사진=서지혜기자


작가는 작고했지만 파리와의 인연은 계속된다. 2023년 초 세계 최대 갤러리 중 한 곳인 데이비드 즈워너 파리에서 작가의 작품전이 열렸고 큰 호응을 받았다. 이번에 PKM갤러리에 걸린 작품 27점은 모두 국내에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이며, 이 중 일부는 장 브롤리와 데이비드 즈워너 등 해외에서 전시돼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전시는 6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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