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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정치농업’을 경계한다

김한호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





정부 수립 후 처음 공포한 농업법이 1948년 ‘양곡매입법(매입법)’이다. 이 법 제10조는 양곡 국외 유출에 사형까지 가능하도록 규정했다. 해방 직후 심한 양곡 부족 상황에서 도입한 정부 의무 매입법이다. 지난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로 최종 부결됐다 야당이 다시 개정을 추진하는 ‘양곡관리법(양곡법)’의 모태이다.

이때 매입 가격을 상대적으로 낮게 설정하면 소비자, 높게 설정하면 생산자 보호법이 된다. 산업화 초기에 저임금의 도시근로자 생계비도 고려해야 하고 부족한 양곡 증산을 위해 농업인의 의욕도 북돋워야 하는 상반된 정책 목표에 부닥쳤다. 이에 정부는 오랫동안 생산자에게는 높은 가격을, 소비자에게는 낮은 가격을 유지하는 이중가격제를 시행했다. 차액은 정부 부채로 처리했다. 이렇게 정부 매입은 공급 부족일 때 할 수 없이 선택하는 재화 수급 대책이다. 이런 때를 넘어 한국 농업을 둘러싼 국내외 환경과 양곡, 특히 쌀 수급 상황은 크게 변했다. 매입법도 양곡법으로 대체돼 지금까지 변하는 환경을 좇아 힘겹게 진화했다. 그래서 이번 개정안을 보며 몇 가지 우려한다.

개정안은 지난 75년간 양곡법 진화를 단숨에 되돌리므로 상황 역행이며 시대착오이다. 지금은 쌀 공급 초과 기조가 고착된 상황이고 국내 정책을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맞춰야 하는 시대이다. 이런 상황과 시대를 대비해 이미 2005년 당시 60년 가까이 지켰던 매입제를 폐지했다.



외국의 경험과 교훈도 무시한다. 농산물 수급 안정은 많은 나라가 중시한다. 그러나 정부 예산을 통한 매입과 정부 재고 가중 정책은 지속할 수 없음이 판명됐다. 미국은 ‘융자 수매 제도’에 따른 정부 재고 부담을 털기 위해 50년 이상 몸부림쳤다. 유럽·일본도 정부 매입 없이 시장가격과 연계해 가격 손실 일부분을 보상하고 생산자 조직을 통해 자율적 위험관리 능력을 높이도록 지원한다.

정부의 매입 개시 기준 물량·시기·가격 등을 ‘양곡수급관리위원회’가 사후에 결정하게 해 농가의 자율적 의사결정과 계획 경영을 어렵게 한다. 이는 경영 결과를 정부 의무 매입에 방임하는 도덕적 해이를 유도할 수 있다. 거기다 위원회 결정 과정에는 진통과 갈등이 예견된다. 때에 따라 ‘정치농업’ 판이 될 수 있다.

정부도 궁색하다. 2020년 쌀 변동직불제를 폐지하고 공익형직불제를 도입하며 쌀값 안정을 강조했다. 가루 쌀을 비롯한 대체 작물 확대 정책은 아직 효과가 크지 않다. 시행착오라도 감수하며 뭔가 대투입 전략을 시도했더라면 사태가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정책이 상황과 시대를 거스를 수 없다. 정치농업이 싹 터서도 곤란하다. 국회·정부가 다시 논의하는 기회를 잡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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