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내건 명분 중 하나가 ‘헌법 개정(개헌)’입니다. 취임 후 3년 안에 개헌을 끝낸 뒤 2028년 치러지는 총선과 함께 물러나겠다는 구상입니다. 한 전 총리는 “취임 첫해에 개헌안을 마련하고, 2년 차에 개헌을 완료하겠다”며 “3년 차에 새로운 헌법에 따라 총선과 대선을 실시한 뒤 곧바로 직을 내려놓겠다”고 강조했습니다.
개헌 외에도 경제·통합·통상 등 여러 조건을 들며 자신이 출마해야만 하는 이유를 강변했지만, 사실상 개헌 하나만을 내걸고 ‘승부수’를 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을 감안하면 정국의 블랙홀인 개헌을 내걸면서 다른 이슈를 다룬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개헌을 하려면 국회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데, 170석의 더불어민주당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법체계로는 개헌을 하는 과정 자체가 ‘위헌’입니다. 2014년 헌법재판소가 국내 거소신고가 돼있는 재외국민에게만 국민투표권을 인정한 국민투표법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국민투표권은 대한민국 국민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인정돼야 하는 권리인 만큼, 재외선거인의 의사도 국민투표에 반영돼야 한다는 게 헌재의 논리입니다.
한 전 총리가 개헌에 ‘진심’이었다면 국민투표법 개정 목소리도 출마선언문에 함께 담았어야 합니다. 개헌 특별담화를 통해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은 재외국민 투표권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고 호소했던 우원식 국회의장처럼 말입니다.
헌재의 위헌 결정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입법권을 갖고 있는 국회는 무엇을 했을까요. 2014년 헌법불합치 판정 이후 지난해 5월 임기를 종료한 21대 국회까지 총 30번의 국민투표법 개정안이 발의됐습니다. 그중 7건에 재외국민에게도 국민투표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하지만 이들 법안 모두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하지 못한 채 임기만료로 폐기됐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22대 국회에서도 김영배 민주당 의원을 시작으로 국민투표법 개정안은 발의되고 있습니다. 김 의원 외에도 윤후덕·김용민·권향엽(이하 민주당) 의원과 박정훈 국민의힘 의원이 국민투표법 개정안을 냈습니다.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그래도 법안으로 개헌에 대한 ‘진심’은 표현했습니다.
재외국민 못지않게 중요한 게 18세 청소년에게도 국민투표권을 주는 문제입니다. 2019년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이들에게 투표권이 생겼지만 국민투표법은 여전히 ‘19세’에 머물러 있습니다. 대통령도 뽑을 수 있는데 국민투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대 국회에선 김관영(당시 국민의당) 의원이, 22대 국회에선 백혜련 민주당 의원이 이 문제 해결에 방점을 둔 개정안을 냈습니다. 22대 국회에선 윤후덕·권향엽 의원의 법안에 이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2·3 비상계엄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로 이념과 정당을 가리지 않고 개헌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헌이 목소리만 낸다고 되는 일이었으면 ‘87년 체제’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진 않았을 것입니다.
대통령제 여부를 논하는 권력구조 개편은 둘째 치고,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로 할 것인지 남한으로 할 것인지, 성평등인지 양성평등인지, 민주주의의 인정 범위를 자유민주주의에 한정할 것인지 사회민주주의도 인정할 것인지 등등. 논의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닙니다. 문재인 정부 당시엔 정부에서 개헌안을 만들었지만 야당이 호응해주지 않아 불발되기도 했습니다.
지난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일부 인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개헌 속도전’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헌이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국민투표법 개정부터 먼저 해결하는 것은 어떨까요. 입법부가 입법 의무를 행하지 않은 상태를 ‘입법부작위’라고 말합니다. 국민투표법 개정의 의무는 국회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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