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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美談]박수근서 무명 작가까지…‘나만의 컬렉션’ 만들고 전시회도

■일반시민도 ‘미술품 소장’ 시대

김환기 등 500여점 모은 황정수씨

헌책방서 그림 보다가 미술에 눈 떠

전시회 수시로 방문 발품 들여 수집

월급 쪼개 만든 '포트폴리오'에 애착

“열정만 있다면 누구든 컬렉터 가능”

이종우 '아침' /황정수 컬렉션




“회장님만 미술품을 수집하나요? 나 같은 월급쟁이 소시민도 컬렉터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소장한 작품이 500점 정도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은 예산으로 제일 실속 있는 컬렉션을 꾸린 게 아마 나일 거예요.”

어느새 ‘미술평론가’라는 타이틀이 붙은 황정수 씨는 6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스페이스 월인에서 자신의 소장품 전시 ‘서촌에서 근대를 거닐다’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의 컬렉션으로 우리나라의 근대미술사를 얼추 정리할 수 있을 만한 전시였으니 ‘실속’을 자랑스러워할 법했다. 미술 애호가로 유명하고, 특히 한국 근대미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방탄소년단(BTS)의 RM이 휴가 중이었음에도 전시장을 방문해 방명록에 ‘김남준’이라는 이름을 남겨놓고 갔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2021년 4월 타계한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수집 미술품과 문화재 2만 3000여 점을 삼성가(家) 유족이 국가에 기증하면서 한국은 ‘이건희 컬렉션’ 열풍으로 달아올랐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유동성 완화로 한국 미술 시장은 1조 원의 장벽을 뛰어넘었고 ‘프리즈 서울’ 등 국제적인 미술 행사가 열리면서 미술 향유의 대중화가 본격화했다. 미술 전시회 관람을 넘어 실제 미술품을 구입하는 ‘컬렉터’ 인구는 정확하게 집계되지 않으나 대략 1만 5000명에서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이 매년 7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모으고 이 중 한국화랑협회의 VIP 메일링 대상이 1만 4000명 이상이라는 점, 국내 양대 경매 회사인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의 회원 수 증가 상황 등을 입체적으로 분석한 추정치다. 자산가인 ‘회장님’이나 ‘영앤리치 컬렉터’는 아니지만 월급과 용돈을 아껴 작품을 사는 ‘소시민 컬렉터’ 시대가 열렸다는 뜻이다.

정말조 '소녀' 황정수컬렉션


이름하여 ‘황정수 컬랙션’은 초보 컬렉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만하다.

“국민화가 박수근의 그림을 꼭 한 점 갖고 싶었지만 엄두가 안 났죠. 하지만 목판화는 50만 원 정도에 살 수 있었어요. 사후 판화라고 평가절하할지 모르지만 그건 ‘시장 논리’이고 나는 소띠라 소 그림이 좋아서 박수근 판화를 하나 더 구했죠.”

컬렉션의 제 1원칙. ‘나만의 컬렉션’에 의미를 둔다. 황 씨는 근현대미술의 대가 남관의 작품 중에서도 “내가 태어난 1961년에 그린 작품”에 더 큰 애착을 가진다.

황 씨는 미술 전공과는 무관한 국문학도다.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연민 이가원을 스승으로 공부하던 시절, 청계천 헌책방에서 교재를 구하다 자연스레 곁에 놓인 그림들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한학을 공부했으니 남농 허건, 청전 이상범 등 동양화가의 서명과 낙관이 읽혔고 자주 많이 보다가 자연스레 안목이 열렸다. 학생이라 비싼 그림은 엄두도 못 냈고 국어 교사가 돼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소품과 드로잉·판화 등으로 컬렉션을 시작했다.

“김환기의 드로잉은 100만 원 정도에 구입했어요. 1967년 미국 뉴욕에 있던 김환기가 친구인 시인 김광섭에게 보낸 항공 우편, 즉 그림 편지죠. 지금은 수십억 원 그림값의 화가 김환기지만 뉴욕 시절에는 고생이 많았는데 그 사연이 뒷면에 적혀 있어요.”

우편 겉면의 위쪽에는 구름과 학, 아래에는 달과 산이 번갈아 그려져 있다. 손글씨로 적은 영문과 한자의 필체도 그림 못지않게 빼어나다.



국문학도가 헌책방에서 그림을 보기 시작했으니 1970~1980년대 문학 잡지에 수록된 삽화도 소장품으로 확보했다. RM이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진을 찍어 올린 천경자의 수묵화 ‘거울 보는 여인’도 삽화 용도로 제작된 그림이다.

천경자 '거울 보는 여인' /사진=황정수


컬렉션의 두 번째 원칙은 철학과 취향이 분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철학이 꼭 심오하고 원대할 필요는 없다. 황 씨의 경우는 근대미술에 대한 애착, 역사가 놓친 화가들을 발굴하고 지키려는 의지가 크다. 김환기의 편지 그림, 건축가 김수근의 인물 드로잉 등 사연 있는 의외의 작품도 눈여겨보는 편이다.

한국 근대미술에 대한 애정이 확고한 황 씨는 파블로 피카소나 오귀스트 로댕보다도 최영림과 권진규를 더 좋아한다. 그가 소장한 최영림의 ‘꿈 꾸는 여인’은 피카소가 낮잠 자는 여인을 그린 ‘꿈’과 비슷한 구도다. 권진규의 테라코타 ‘인물1’은 쭈그리고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여인을 보여준다. 근대 공예·디자인의 거장인 유강열의 작품을 가리키며 “넘실대는 파도 표현이 기막히다. 일본 우키요에 거장 호쿠사이의 파도가 동양의 바다 그림 중 제일 유명할테지만 우리는 유강열을 다시 봐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컬렉션의 또 다른 철칙은 발품과 안목. 발품을 들이는 만큼 더 좋은 작품을 보다 좋은 가격에 구할 수 있다. 위작이나 태작(수준 낮은 작품)을 피하려면 안목도 필수인데 안목을 높이는 방법은 좋은 전시를 많이 찾아보며 경험을 쌓는 게 최고다.

권진규 테라코타 '인물1'


‘황정수 컬렉션’ 중 하나인 서양화가 이종우의 그림 ‘아침’은 1970년대 국무총리실에 걸렸던 작품이다. 정치인 김종필의 소장품이었는데 국무총리 재직 당시 공관에 걸어뒀던 것이다. 1957년 국전(國展) 출품작이기도 한 이 그림이 2016년 케이옥션 경매에 나왔길래 큰맘 먹고 구입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등 기관 전시에서도 빌려갈 정도의 작품이니 후회는 없다.

그윽한 눈매가 매력적인 이응노의 작품 ‘은진미륵’은 15년 전에 900만 원에 팔았다가 다시 사들인 작품이다. 당시 구매자는 한 저축은행이었는데 파산으로 소장품이 경매에 나왔고 황 씨는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되찾아왔다.

미술수집가 겸 미술평론가 황정수


미술품 애호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황 씨는 국내 주요 컬렉터 중 한 사람인 고(故) 이우복 전 대우 회장과 교류했다. 이 회장이 소장한 유영국의 1957년작 소품 2점이 자꾸만 눈에 밟혀 수차례 찾아갔다. “꼭 젊은 시절 나를 보는 듯하니 가져가고 나중에 딸에게 물려주시게.” 15년 전 소장하게 된 유영국의 작품은 이후 작가에 대한 꾸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가격이 수십 배 상승했다. 그림 값 오른 것보다도 외동딸이 미술사학을 전공하게 된 것이 더 기뻤다. 컬렉션을 자연스럽게 가족과 함께 공유함으로써 삶이 스스로 방향을 찾아간다는 게 그가 터득한 진리다. 황 씨의 경우 실증적인 미술사 연구자로서 미술관도 발견하지 못한 오류를 바로잡을 정도의 권위자가 됐다. 저서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푸른역사 펴냄)’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그림은 꼭 비싸야 좋은 게 아닙니다. 내 삶과 맞닿아 있는, 나에게 말을 거는 그림을 찾아서 한 점씩 모아보는 것도 좋은 시작이에요. 열정과 애정만 있다면 누구나 컬렉터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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