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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폴리틱스’ 시대가 왔다 [이보형의 퍼블릭어페어즈]

이보형 마콜컨설팅그룹 대표


기업의 퍼블릭 어페어즈(Public Affairs) 활동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정부 관료를 만나고 국회의원을 설득하면 정책은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여전히 정치권이지만, 정책을 움직이는 힘은 시민단체, 전문가, 이익단체, 미디어 등 ‘제3자 그룹’으로 분산되고 있다. 권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흩어졌을 뿐이다.

정책은 법과 제도, 그리고 예산이라는 형식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그 형식을 실질적으로 만드는 본질은 ‘사람’과 ‘이해관계’다. 과거처럼 관료나 국회의원만을 겨냥한 일방향 설득으로는 설 자리가 없다. 여론을 선점한 시민단체 하나가 기업의 시장을 송두리째 흔들고, 학회 성명 하나가 법안의 생사를 갈라 놓는 시대다. 사회적 설득력이 없는 정책은 제도화되지 못하고, 제도화되지 못한 정책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환경·보건·플랫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 같은 흐름은 더욱 뚜렷하다. ‘탈플라스틱’ 캠페인으로 출발한 일회용 컵 규제는 몇몇 시민단체와 소비자단체의 꾸준한 이슈 제기와 언론 연계로 국회까지 연결됐고, 법제화로 이어졌다. 기업들은 규제가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본질을 인식했다. 문제는 사후 대응이 아니라, 초기의 무관심이었다.

제약업계의 약가제도 개편 역시 마찬가지다. 환자단체와 전문가 그룹이 ‘신약 접근권’이라는 공공성을 앞세우자 정책 프레임은 완전히 전환됐다. 정책을 앞당긴 건 정부가 아니라, 정책 바깥에서 문제를 구조화한 이들이었다. 정당성과 긴급성을 확보한 제3자가 정책 결정의 흐름을 바꾼 셈이다.

ICT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일명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은 정부나 기업이 아니라 소상공인 단체와 소비자 권리단체들의 요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알고리즘의 투명성, 입점 수수료 문제 등을 제기하며 여론을 장악했고, 국회는 이 흐름을 외면하지 못했다. 플랫폼 기업들은 법안의 정합성에 대해 반박했지만, 사회적 정당성을 넘지 못한 반론은 정책의 벽을 막지 못했다.

이제는 정책의 권력 구조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해관계자는 정부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점점 더 조직화되고 다층화되고 있다. 이제 소셜폴리틱스의 시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기업이 생존하려면 이들과의 관계설정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누구를 설득하고, 누구와 협력하며, 누구의 반발을 예측할 것인가. 이 복잡한 지형을 해독하는 도구가 바로 ‘살리언스(Salience) 모델’이다.

살리언스 모델은 이해관계자의 속성을 세 가지 기준으로 분류한다. ‘권력을 가졌는가’ ‘정당한가’ ‘긴급한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따라 기업은 대응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 목소리가 크다고 반드시 설득해야 할 대상은 아니며, 영향력이 낮다고 무시해도 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정당성과 긴급성을 가진 ‘의존적 이해관계자’는 언론과 여론을 움직이는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 그룹이다. 환경단체, 환자단체, 소비자단체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이들과의 조기 협력은 사회적 지지와 정책 우군 확보의 핵심이 된다.



반대로, 권력과 긴급성을 동시에 가진 ‘위험한 이해관계자’는 사전 대응 없이는 돌이킬 수 없는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 정치권 핵심 인사나 거대노조, 언론 권력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단순한 메시지로는 설득할 수 없으며, 신뢰 기반의 대화 채널을 사전에 확보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많은 기업들이 여전히 정부와 국회라는 공식 경로에만 의존한다. 변화한 환경을 읽지 못하고, 전략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설득의 기술을 넘어, 조율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해관계자의 언어를 읽고, 갈등을 구조화하며, 공통의 정책목표를 재설계하는 일. 퍼블릭 어페어즈의 본령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해관계자 맵핑은 결코 고비용 전략이 아니다. 포럼 하나, 리서치 하나, 소규모 자문그룹 운영만으로도 충분한 데이터와 신호를 얻을 수 있다. 관건은 이를 전략으로 축적할 수 있는 체계와 의지다. 정책은 언제나 사람의 손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지금 그 손은 점점 더 정부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퍼블릭 어페어즈 전략의 타깃은 넓어져야 한다. 정부청사나 국회만이 아니라, 거리의 시민사회, 기자실의 여론, 전문가의 보고서가 기업을 둘러싼 정책 환경을 바꾸고 있다. 이들을 이해하고, 구분하고, 조율하지 않으면 기업의 논리는 정책의 언어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정책이 되지 못한 논리는 곧 시장에서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서경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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