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지방법원 통영지청이 지난달 21일 사기 혐의로 피고인 A 씨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A 씨는 카페 인수 자금이라고 속여 4050만 원을 편취하고 매월 갚기로 한 피해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하지만 법원은 피해자의 배상 신청에 대해서는 ‘배상 책임 범위가 명백하지 않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날 서울남부지방법원도 사기 혐의로 기소된 B 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도 피해자들의 배상 신청은 각하했다. 배상 책임의 범위가 명백하지 않다는 게 사유였다.
8일 사법연감에 따르면 법원의 배상명령 인용률은 2023년 35.5%를 기록했다. 2020년 49.8%로 절반 정도 인용되다가 최근 수년간 꾸준히 낮아지는 추세다. 사기 등 범죄 피해자가 제기한 배상명령 신청 10건 가운데 7건이 각하되고 있는 것이다.
배상명령은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소송촉진법)에 따른 국내 대표적인 피해자 구제 조치다. 사기, 절도 등 재산 범죄 피해자가 별도 민사소송 없이 형사재판 과정에서 손해를 회복할 수 있도록 1981년 도입됐다. 소송촉진법 제25조(배상명령)에 따르면 유죄 선고 경우 법원은 직권이나 피해자 등 신청에 따라 범죄 행위로 발생한 물적 피해, 치료비 손해, 위자료의 배상을 명할 수 있다. 대상 혐의도 사기를 비롯해 상해, 성폭력 등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해마다 법원의 배상명령 인용률이 크게 떨어지면서 피해자들에게는 효과적인 피해 구제 사다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법원의 배상명령 각하 사유는 주로 피해자 성명·주소가 분명하지 않거나, 피해 금액이 특정되지 않은 경우다. 또 피고인의 배상 책임의 유무 또는 그 범위가 명백하지 않은 때도 포함된다. 배상명령으로 인해 공판 절차가 현저히 지연될 우려가 있거나 형사소송 절차에서 배상명령을 하는 게 타당하지 않는다고 인정되는 경우도 각하 사유다.
문제는 배상명령 신청의 필수 요건인 피해 금액을 사기 피해자들이 스스로 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여러 계좌가 동원되고, 피해자가 수천 명에 이르는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 금액을 특정해 제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게다가 피고인으로부터 일부라도 피해 금액을 변제받았을 경우 법원이 ‘피고인의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해 추후 보상받을 길이 막힐 수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5000만 원을 편취한 후 단 100만 원이라도 갚으면 이미 일부를 배상했기 때문에 피고인의 배상 책임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배상명령 청구는 형사재판과 함께 진행되는데 1심 판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신민영 법무법인 예현 변호사는 “배상명령은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민사재판에 해당하는 보상 판단을 형사재판에서 함께 해주는 것이지만 그만큼 기간도 오래 걸린다”며 “반드시 피해 금액을 산정해 법원에 제출해야 하는데, 변호사 등 전문가들의 도움 없이는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사기 사건의 지능·고도화로 돈의 흐름이 한층 복잡해지면서 피해자가 스스로 어느 정도 금전적 손실을 입었는지 산정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이어 “일각에서는 피해 상황이 심각한 사기 피해자의 경우 국선 변호사 수를 늘려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지만, 이는 다른 범죄 피해자들과의 형평성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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