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엔이 지정한 세계 양자과학·기술의 해다. 양자역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에르빈 슈뢰딩거와 독일 국적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그 문을 연 후 100년 동안 트랜지스터나 반도체 등 우리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기술을 창출했다. 최근 등장한 양자컴퓨팅 개발에는 구글이나 IBM·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고 있다. 컴퓨팅뿐 아니라 센싱·통신·암호 등 그 응용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이렇듯 이제 양자역학은 물리를 넘어서 과학으로, 과학을 넘어서 기술로 발을 넓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슈뢰딩거나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을 탐구하기 시작할 때 처음부터 그 응용 기술을 짐작하거나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순전히 자연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해서 그 본질에 이르렀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의 이론이지만 오늘날 위치정보시스템(GPS)이나 우주 탐사 기술에 사용되고 있다. TV나 통신·전자레인지 등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전자기파조차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했던 하인리히 헤르츠의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이렇듯 과학은, 특히 물리와 같은 기초과학은 그 쓰임과 상관없이 자연을 탐구하는 과정 중에 장기적으로, 때로는 10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우리 주변의 쓸모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기초과학은 다양한 주제에 투자하고 긴 호흡으로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기초연구는 돈을 투자한다고 해서 1~2년 내 바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일단 인력이 키워져야 하는데 사람 한 명을 키우는 데는 최소 5년이 걸린다. 이러한 이유로 기초과학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투자하기에는 쉽지 않고 정부의 안정적인 지원과 투자가 어느 분야보다도 중요하다.
우리 경제는 지난 70년간 생산기술을 토대로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추격자가 아니라 선도적 기술 개발을 이뤄야 하는 단계다. 그런 의미에서 첨단기술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첨단기술은 첨단과학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런 첨단과학은 기초연구가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난 2년간 기초연구는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편성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 예산의 효율적 배분을 위한 조정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이러한 조정은 예측과 대비가 가능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조정은 그동안 키워온 연구 인력들을 여기저기로 흩어 놓았고 연구비가 끊긴 연구자들은 연구를 포기하고 있다. 이대로는 기반이 무너져 회생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기초과학 연구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는 1~2년으로 충분하지만 이를 다시 세우는 데는 그 10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책 당국자들은 유념해야 할 것이다.
기초연구는 장기적 관점에서 인류의 지식 기반을 확장하고 미래 혁신과 기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필수적이다. 기초연구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보장하고 장기적 가치를 인정하는 정책적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통해 한국의 과학기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미래 사회의 도전 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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